나의 이야기

[스크랩] [27편]조부 김익순의 과거행적 비난으로 장원 폐족 사연 숨긴 어머니 이씨는 긴한숨만

김참봉 2010. 11. 16. 12:04

 

 

 

 

난생처음 진수성찬을 받아본 병연은 마음껏 호음호식(豪飮好食) 하고나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축하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고 2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은 자기 혼자여서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병연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일어나 원님에게 작별인사를 올렸다.

"아암, 그렇지. 빨리 집에 가서 오늘의 이 기쁨을 전해야지. 앞으로 이 사또가 부를테니 이 고을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해주기 바라네."

병연은 원님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대청공당에서 나와 뜰 아래로 내려서니 기다리던 이방이 비단과 지필묵을 싼 보따리를 병연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이 물건은 오늘 백일장에서 장원한 상품으로 주는 귀한 물건들이었다.

병연은 둥근 달빛을 받으며 한참을 걸어서야 봉래산 북쪽 능선에 있는 마옥재로 오르니 달빛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는 동강 언덕에 자리한 집을 내려다보며, 장원소식을 접할 어머님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병연은 서둘러 산길을 내려오면서 문득 오늘 원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왜 '어머님한테 글을 배웠다'는 말을 못했을까.

이 시대의 평민에게 글 배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더욱이 여인의 글을 배운다는 것은 귀한 양반댁의 여식(女息)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엄청난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남의 사랑방이나 행랑채로 이주를 거듭하면서 여인의 몸으로 고된 품팔이를 해가며 언제 그 많은 글을 익혔단 말인가.

병연은 새삼 어머니의 학식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마당앞 사립문이 가까워오자 인기척이 들렸다.

"당신 이제 오세요?"

사립문 밖에 나와 서서 기다리던 아내의 목소리였다.

"나요. 좀 늦었구려."

병연은 가까이 다가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나 오늘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했소!"

"어머! 장한 일 하셨어요. 자 어서 들어가세요.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아내는 남편의 등에 짊어진 보따리를 받아들고 마당에 들어서는데 이미 방에서 인기척을 듣고 형님 내외가 황급히 뛰어 나왔다.

"성심이. 이제 오냐?"

"네. 형님. 오늘 백일장에서 장원했어요!"

"무어! 장원을 했어? 이 형도 짐작은 했다만... 우리 집에 경사 났구나!"

병연의 마당은 축제분위기로 떠들썩했다.

"빨리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소란이냐?"

병연은 방에서 들리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안방으로 들어가 미동(微動)도 않고 앉아계시는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오늘 백일장에서 어머님이 가르쳐준 글로 수 많은 문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장원을 했습니다."

"어찌 이 어미의 글이냐? 둘째의 글이지. 장하다"

 함평 이씨는 목이 메어왔다.

'불쌍한 녀석! 앞으로 폐족이라는 신분이 밝혀질 텐데 이를 어찌할꼬'

긴 한숨을 내쉬는 함평 이씨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왔다.

"어머니.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니다 너무 기뻐서...그래. 오늘 백일장의 시제는 무엇이었더냐?"

"네. 십여 년 전에 서북(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 때..."

"무엇이! 홍경래?"

"네. 정가산의 충절과 역적인 홍경래에게 항복한 김익순의 불충한 죄에 대하여 필하라는 시제였습니다."

"그래. 무어라 필했느냐?"

어머니의 입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홍경래에게 항복한 김익순을 사정없이 몰아쳤습니다. 김익순의 죽은 혼 황천에도 못갈 것이고, 한 번의 죽음은 그 죄가 가볍고, 맘 번 죽어 마땅하다고 호되게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만둬라! 이 일을...!"

함평 이씨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나아가 마당을 가로질러 동강이 흐르는 물가로 가더니 강 건너 높이 솟은 완택산 정상을 향해 우뚝 섰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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