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8편]숨겨왔던 폐족 사연과 집안 내력 밝히자 병연은 놀라고 황망해 하며 자책에 빠져
둥근달은 완택산 정수리 위에서 밝게 비쳤다.
그녀는 우뚝 솟은 완택산과 둥근달을 향해 정중히 서서 손바닥을 맞대고 가슴께로 올려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이 이 못난 며느리의 잘못이옵니다. 아버님! 오늘의 모든일 너그럽게 푸시고 불쌍한 손자 병연이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함평 이씨는 진정으로 흉사하신 시아버님께 용서를 빌었다.
실은 정작 아들들에게 집안의 내력을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오늘의 이 치욕적인 욕을 당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어머님! 왜 이러세요?"
어머니의 행동에 당황한 병하와 병연이가 뒤따라 나와 어머니의 행동을 만류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동도 않은 채 둥근 달빛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머님? 들어가세요. 아직도 밤기운이 찹니다."
"그래 들어가자꾸나."
둥근달을 응시하던 함평 이씨는 그 무었을 결심이나 한 듯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정좌하고 앉았다.
이어 병하와 병연이도 들어왔고, 밖에서 웅크리고 서 있는 두 며느리에게 말했다.
"애기들도 들어오너라."
시어머니의 말에 창원 황씨와 장수 황씨인 두 며느리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와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 정작 너희들에게 집안 내력을 말했어야 했는데, 이 어미의 죄가 더 많구나."
함평 이씨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폐족이라는 절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오면서 악착스럽게 미래를 위해 엄중히 글을 가르치던 그 의지와 결심의 표정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모습은 차분하면서도 비장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말해주마.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희들의 관향(貫鄕)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후손으로 양주(楊州)에서 태어났느니라.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에 사는 사람들은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인들은 우리 가문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희들은 세도가 당당한 장동김씨(壯洞金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오늘 네가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욕을 퍼부은 선천부사와 방어사의 중책에 계셨던 익자(益字) 순자(淳字) 되시는 분이 바로 너의 할아버지시다."
"넷! 우리 할아버지?"
병연의 절규였다.
"그래. 너희들 할아버지시다. 병연이가 다섯 살이던 해 가을에 함경도 함흥 중군에서 계시다가 평안도 선천부사와 방어사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중책을 맡고 선천으로 가시면서 며칠간 양주의 본가에 들르셨다가 선천으로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너희들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던 분이 너희 할아버지셨다."
병하는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말에 지난날의 기억이 살아나는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병연은 그 당시 너무 어린나이에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고, 훗날 어머니를 만나 이곳저곳으로 이주하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양주의 본가도 남의 집에서 살다가 떠난 집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는 어머니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지금까지 가문과 조상의 내력을 철저히 숨겨왔었고, 언젠가 조부는 어떤 분이셨느냐고 물었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시다가 너희들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참형을 당하셨고, 병연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유배형으로 돌아가셨다. 뒷날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돼 여러 곳을 전전하며 서투른 농사일에서부터 삼베길쌈해주고 삯바느질도 밤 가는 줄 모르게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구나. 하지만 정작 더 어려웠던 것은 집안내력을 숨기면서 폐족의 집안으로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는 일념도 숨겨야 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너희들에게 폭넓은 지식을 갖춰야 했다. 보다시피 우리같은 처지로는 너희들을 서당에 보낼 형편도 못돼 이 어미의 짧은 식견(識見)으로 너희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느니라."
함평 이씨는 너무도 힘겹게 살아오면서 숨겼던 집안내력을 말하면서 쉼 없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누덕누덕 기운 삼베적삼 앞자락이 얼룩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