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33편]이름은 김란, 호는 이명으로 바꾸고 짐 꾸려 한양으로 떠날 채비를 하다

김참봉 2010. 11. 16. 12:05


 

 

 

병연은 자리를 박차고 마당 앞 강가로 나아가 강 상류를 향해 걸었다.

강물은 언제나처럼 유유히 흘렀고, 강둑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꽃망울이 맺혀 봄이 왔음을 알렸다.

강가를 따라 한참을 걸어 강폭이 좁아진 여울목에 다다르니 물살이 세게 흐르고 물소리도 높아졌다.

순간 높아진 물소리를 뚫고 워낭소리가 들려왔다.

병연은 고개를 돌려 워낭소리가 들리는 강 언덕을 바라보니, 누렁이 어미 소가 새끼 송아지를 데리고 갓 돋아난 풀을 뜯느라고 목에 달아놓은 방울이 울리고 있었다.

"김란(金?)!"

병연은 들려오는 워낭소리에서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병연' 대신 성자를 넣어 '김란' 이라는 가명(假名)을 소리내어 부르고는 몇 발자국 상류로 걷다가 발길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방울은 울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명(而鳴)!"

또 다시 환호성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이는 그의 새로운 자(字)였다.

'방울이 울린다'는 뜻으로, 이명은 중국서적인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는 한퇴지(韓退之)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중의 불평이명(不平而鳴)이란 문구가 떠올라, 병연은 자신의 불평에서 나오는 소리의 뜻이 담긴 자호를 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폐족의 신분으로 따라다니던 병연과 성심을 여울목 거센 물결에 실어 보냈다.

김란과 이명.

그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처신을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동안 경국대전 예전에 대역죄에 연좌된 후손들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기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던가.

병연은 폐족의 발목을 잡았던 족쇄를 풀어낸 듯 마음이 설레었다.

그는 강기슭을 오르던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병연이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니 때맞춰 저녁밥상이 들어왔다.

함평 이씨는 병연이가 여니 때와 달리 명랑해진 표정으로 밥상 앞에 앉는 것을 보고 말을 건넸다.

"어라연까지 갔다왔느냐?"

"네. 길을 걷지 않고 강가로 걷느라 어라연까지는 못갔습니다. 어머님? 이젠 봄도 되고 했으니 세상 돌아가는 구경도 할 겸 서울에 올라가서 한 바퀴 둘러볼까 합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병연은 너무 젊었고, 그가 배운 학문도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만큼 지녔다고 생각되었다.

이는 그의 자만심만은 아니었다.

"한양으로.....? 친척을 만나 볼 생각이냐?"

친척이란, 세도정치를 마음껏 휘두르고 있는 김조순이 일가를 이루고 있는 장동 김씨를 이르는 말이다.

"아니요. 지체 높은 집안 어른들은 만나지 않겠습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살펴보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길이라도 찿아볼까 합니다."

병연의 말이 끝나자 함평 이씨는 같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는 며느리인 장수 황씨의 표정을 보고나서,

"그래. 성심이의 뜻이 그렇다면 바람도 쐴 겸 한 바퀴 둘러 보거라. 일전에도 학균이 어미하고 상의했다만, 우울한 몸가짐으로 글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바람이라도 쏘일 겸 결성에 있는 외갓집이라도 다녀왔으면 했었는데... 그런데 한양이라면 사람도 많고 생소하지 않겠느냐?"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람을 찿아야 합니다. 이왕 마음을 정했으니 내일 아침에 떠나겠습니다."

병연의 대답에 함평 이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학식도 그만하면 어디 가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테고, 집에 박혀 있느니 사람이 많은 서울에 가서 그가 바라던 길도 찿아봄직도 했기 때문이다.

병연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내가 꺼내놓은 옷가지를 개어 지필묵이 담긴 필낭과 함께 괴나리봇짐에 넣고 짐을 꾸렸다.

아내인 장수 황씨는 아랫목에서 잠든 학균이를 들여다보며 가볍게 흐느끼고 있었다.

병연은 그러한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여보! 울기는... 당신이 우울해하면 떠나는 내 마음도 무겁구려. 이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염원이지 않소."

병연은 잠자리에 누어 아내를 달래며 힘주어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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