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영양남씨 시암고택 이야기
김참봉
2011. 9. 1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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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고택의 건립은 남진만(南震萬, 1697~1773)이 건립하였고, 그의 5대손 교성(敎成)이 이 고택을 현 소유자의 고조인 남고(南皐, 1807~1879)에게 매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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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침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자형의 홀처마 지붕이다. 평면구성은 안채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장과 상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익사 도장 전면에 1칸 반의 안방과 1칸 반 규모의 부엌 그리고 1칸 곳간이 연접되어 있으며, 우익사 상방 전면으로 반 칸의 통래칸, 1칸 반의 도장, 1칸의 중방과 사랑마루방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중문을 중심으로는 좌측은 마구, 우측에는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로 대들보에 동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치고 있다. 현재 활용도 면에서 보면 대청 좌측 도장은 부엌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그 뒤쪽으로 조립식 1칸의 샤워실을 달아내었으며, 사랑마루는 방으로 꾸몄다. 또한 상방과 연접된 통래칸은 정침 밖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막혀있는 실정이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정면이 다소 넓다.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패를 보관하고 있으며, 가구는 3량가,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었으며, 사방에 기와담장을 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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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대흥백씨(大興白氏) | |
시암선생은 8살 때 아버지(有魯)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 대흥백씨는 아들의 성장, 교육, 예적, 성공 및 전반에 걸쳐서 아들이 장성(長成)할 때까지 책임을 지셨다. 어머니는 현모양처(賢母良妻)로서 타의 모범이 되시고 귀감이 되시는 분이셨다. 선생의 글 공부와 생원(生員)에 급제할 수 있도록 학문과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한 예로 선생이 대청에서 공부하다가 하도 졸려서 졸다가 잠이 들었는데, 이때에 어머니께서 보시고 실망하고 아들의 글공부와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안방 문을 잠그시고 사흘간 식음(食飮)을 전폐하셨는데, 선생은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여 어머니께 빌고 다시는 글공부에 등한시하지 않겠다고 대죄하여 어머니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식사하시고 일상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선생이 44세 1859년(철종 1) 음력 8월 9일에 돌아가시자 선생은 식음을 전폐하고 상례(喪禮)를 치르고 어머니에 대한 유사(遺事)를 지었으며, 학문을 더욱 열심히 하여 학문이 경지에 달하였으며, 해방사표(海邦師表) 시암선생(時庵先生) 이란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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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과 호를 바꾸다. | |
시암선생의 초휘(初諱)는 택환(宅煥)이었고, 부친과 형이 일찍 돌아가시자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성현(聖賢)인 공자(孔子)와 관련하여 언덕 구(丘) 자를 인용하여 같은 언덕이란 뜻인 언덕 고(皐) 자로 개명(改名)하였다. 호(號)는 처음에는 화전(花田)에 있는 대둔산(大遯山)과 이 기슭에 건립한 대둔정사(大遯精舍)의 정신을 담아 둔암(遯庵)이라 하였다가 어휘 발음상 좋지 못하여 항시(恒時) 암자(庵子)와 같은 대둔정사에 있다는 뜻으로 시암(時庵)으로 고쳤으며, 당호(堂號)는 노백당(老柏堂)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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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향대 건립(望鄕臺 建立) | |
망향대는 1848년(헌종 14) 영해부사 우촌(雨村) 남상교(南尙敎)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평소 친분이 두터운 선생에게 봉급에서 쓰다 남은 돈 천 전(千錢)을 주어, 1850년(철종 1)에 시조 영의공이 고향(中國)을 바라보시던 곳인 축산항 죽도(竹島) 남쪽 5부 능선에 망향대(望鄕臺)란 삼자(三字) 표석(表石) 비(碑)를 세웠으며, 건립 날에는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참석지 못하고 독문(督文)을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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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진양성(後進養成)과 인재배출(人材輩出) | |
원구생가 및 대둔정사에서 후진 양성한 인물로는 졸수재(拙修齋) 류정호(柳廷鎬), 구간헌(九干軒) 박영수(朴榮秀), 경암(敬庵) 백규(白煃), 족제(族弟) 남계환(南啓煥), 남건(南健), 조카 남효근(南孝根), 자(子) 효술(孝述), 족손(族孫) 남형진(南衡鎭) 등 친족은 물론 향리 타성(他姓) 유생들도 선생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수업하여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輩出)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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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유물 |
이하 문집(文集) 및 잡저(雜著)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관리하고 있다. - 시암선생문집(時庵先生文集) 15권 8책 - 잡저(雜著): 논어집주고증(論語集註考證), 곤면록(困勉錄), 효경연의(孝經衍義), 비국어변(非國語辯), 치평귀감(治平龜鑑), 금란록(金蘭錄), 추원지(追遠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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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時庵) 남고(南皐) | |
선생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시조 영의공(英毅公, 諱 南敏) 후손이며, 중시조 대광공(大匡公, 諱 洪輔) 23대, 영해입향조 송정공(松亭公) 15대손, 난고(蘭臯) 9대손이다. 선생의 휘는 고(皐, 初諱는 宅渙)이며, 자는 중원(仲元, 初字는 仲安), 호는 시암(時庵, 初號는 遯庵), 당호(堂號)는 노백당(老栢堂)이다. 1807년(순조 7년) 음력 4월 8일, 난고(蘭臯) 8대 사손(嗣孫) 휘 유노(有魯)의 차남으로 영해 원구에서 태어나서, 7세 때 사자(四子)에 통달하셨고, 8세 때 주자여진시랑장서(朱子與陳侍郎長書) 3편을 6․7회 반복해서 외워도 한 자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10세에 논어(論語) 등 성리서(性理書)에 깊이가 있었다. 퇴계학(退溪學)의 적전제자(嫡傳弟子)이며 대학자이고 문신(文臣)이신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수학하여 학문이 고귀하고 정심(整心)하며 해박(該博)함이 금세에 제일이라 칭송하고 기문(記文)하여 현판(懸板)으로 전하고 있으며, 퇴계학의 재전제자(再傳弟子)로서 해방사표(海邦師表) 시암선생(時庵先生)으로 칭하였다. 1840년(헌종 6년) 3월(33세),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에 입격(入格)하셨다. 1849년(헌종 15년, 43세 때) 경북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花田, 꽃밭) 대둔산(大遯山) 기슭에 산 이름을 따서 대둔정사(大遯精舍)를 건립하여 학문의 전당(殿堂)으로 삼아 당시 영해부사(寧海府使) 족친(族親) 우촌 남상교(雨村 南尙敎), 이종상(李鍾祥), 류치호(柳致鎬), 김대진(金岱鎭) 등과 학문교류와 서신 등을 왕래하였고, 또한 수많은 후학과 인재를 배출하였다. 1879년(고종 16년) 음력 1월 7일에 73세로 생을 마감하여, 묘소(墓所)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원창수(慶北 盈德郡 蒼水面 元蒼水)에 안장(安葬)되었으며 석물(石物, 비석 및 상석 등)이 잘 갖추어 있다. 시암선생은 학문의 전당인 대둔정사에서 『시암선생문집(時庵先生文集)』 15권 8책과, 『논어집주고증(論語集註考證)』, 『곤면록(困勉錄)』, 『효경연의(孝經衍義)』, 『비국어변(非國語辯)』, 『치평귀감(治平龜鑑)』, 『금란록(金蘭錄)』, 『추원지(追遠志)』등의 많은 서책을 편찬(編纂)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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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유물 | |
- 영덕 시암고택(盈德 時庵古宅) 이 건물은 남진만(1697~1773)이 살림집으로 건립한 것을 그의 5대손 교성(敎成)이 친족인 남고(南皐/호는 時庵, 1807~1879)에게 매도하였다고 한다. 현 소유주의 고조부인 남고는 영양남씨 영해 입향조인 송정의 14대손이자, 난고의 8대손인 유노(1770~1814)의 차남으로 살림을 나면서 이 집을 구해 크게 중수하여 살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라 태풍(1959년 9월 17일) 시 정침과 사당이 침수되어 기둥과 벽체, 구들, 마루, 담장 등을 보수하였으며, 그 후 영해향교 구와(舊瓦)를 이용해 정침을 번와하고, 노후한 서까래 교체, 부엌을 입식으로 개조, 기름보일러 설치, 블록 담장으로 교체, 2004년에 사당 번와 공사, 감실 보수, 토석담장 보수 등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시암고택의 건축 형성시기가 18세기에 초창, 19세기에 중수된 것으로 미루어 현재의 건물은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대체로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암고택의 구조 양식이나 수법 등의 건축적 가치는 다소 미흡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평면형식 등에서는 이 지역의 특색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우산각과 서산각의 특징을 서로 지니고 있는 절충식의 구조는 흔하지 않은 수법으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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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저의 처가집(장인 남병수)입니다.
좋은 자료 주심에 감사 인사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