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안동김씨(장동김씨)가문의 성장과번영
장동김씨[장김(壯金),(신)안동김씨]가문의 성장과 번영 최초등록일 2009.03.06 15:58
최종수정일 2011.03.2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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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부터 본향인 안동 풍산 소산리을 떠나 한양(청풍계,장의동)에 세거 하면서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던 세도가문 장동김씨(壯金 = 新안동김씨중 서울京派)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입구에 있는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시비
청원루(淸遠樓)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번지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로 지정 되어있다. 조선 중종 때 시강원문학과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낸 청음 김상헌의 증조부 김번(金璠,1479-1544)이 관직에서 은퇴하고 돌아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선생이 병자호란때 예조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1640년1월 청나라 심양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귀국한 후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으로, 증조부(김번)가 지은 기존 건물을 인조21년(1643)에 누각식으로 중건하면서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하였다 한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 규모였으나 1934년 대홍수 때 허물어져 현재 청원루만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안동 김씨 소산종회’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삼구정(三龜亭)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76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연산군(燕山君) 2년(1496)에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고조부인 영천군수 사헌부장령 김영수(金永銖,1446-1502)가 88세 되는 어머니(예천권씨,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권맹손의딸)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형님인 사헌부감찰 김영전(金永銓,1439-1522)과 상의하여 건립한 것으로 여러 차례 보수와 중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삼구정이란 명칭은 거북이 모양의 돌이 3개(고인돌)가 있어서 붙인 것으로, 거북은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어머님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양소당(養素堂)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18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경북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성종 때의 영천군수 사헌부장령을 지낸 청음 김상헌의 고조부인 김영수(金永銖,1446-1502)선생의 종가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ㅁ'자형의 한옥이다.
돈소당(敦素堂:비안공 구택)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24-3번지에 있으며 조선 세종 때 비안현감을 지낸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6대조인 비안공 김삼근(金三近:1390?-1465)의 옛 집이다. 그는 풍산현 남불정촌에 살았으나 둘째아들 보백당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 출생한 이후 이곳 소산리로 옮겨와 살았으며 이 무렵에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인다. 김삼근의 맏손자인 학조(법명은學祖;道號는등곡또는황악산인;본명은金永衡,1432-1514)와 둘째 손자인 김영전(金永銓,1439-1522)은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났는데, 학조는 세조~연산군때의 국사로 수많은 불경언해와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김영전은 성종때 좌리원종공신을 하사받았으며, 사헌부감찰 합천군수 등을 지냈다. 이 집은 소산리에 있는 소요산 기슭에 터를 잡아 남향으로 배치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ㅁ' 자형 목조 기와집이다. 이 건물의 정면에 돈소당(敦素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감찰공 김영전의 9대손 돈소당 김언행(金彦行)의 호를 따서 부르던 이름이다.
태고정(太古亭)
경북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에 있으며 시도민속자료 제27-2호(안동시)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조선 중종때 동부승지 강원관찰사등을 역임한 삼당(三塘) 김영(金瑛,1475-1528, 청음 김상헌의 종증조부)이 서울 청풍계(淸楓溪,현 청운동)에 지어 거처하던 곳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공이 세상을 떠난 중종23년(1528, 1522년건축으로 추정함) 이전임에는 분명하다. 그후 공의 손자 거창현감 창균(蒼筠) 김기보(金箕報,1531-1588)가 안동 풍산 소산(素山)으로 낙향한 이후에는 공의 종증손 선원 김상용(金尙容)이 수리하여 사랑방으로 사용했다. 이후 주로 김상용의 후손들이 한말(韓末)까지 수백년을 관리해 왔다. 그후 우여곡절 끝에 1910년경 어느 일본인 회사 소유가 되어 헐릴 위기에 처하자 이 정자를 지은 삼당공의 후손들이 선생의 본향(本鄕)인 소산으로 1926년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당 김영(三塘 金瑛, 1475~1528) 시비
빈 배의 섯는 백로 벽파의 씻어 흰가
녜 몸이 져리 휜들 마음조차 흴쏘냐
만일 마음이 몸과 갓하면 너를 좃차 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