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1편]반란 거사계획 밝혀낸 조부 김익순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에 끝내 동조
홍경래는 우선적으로 평안도민의 정치참여배제 등 지역차별정책에 불만이 많은 몰락한 양반, 상인 이속, 토호 등을 농민군의 지도부로 포섭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평안도의 주요 고을마다 지방조직을 결성했으며, 그밖에도 압록강 너머 망반인(亡叛人) 등과도 연계를 맺고 모든 반정부세력을 규합했다.
한편으로는 운산(雲山) 촉대봉(燭臺峰)에 광산을 개설하고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광산노동자와 빈민, 유랑민 등을 고용해 품삯을 주며 농민군의 하층군사로 삼아 훈련시켰으며, 각종 무기와 물자를 구입'제작해 다복동에 비축해 두었다.
당초에는 거사일을 12월 20일로 정했는데 거사계획이 김병연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에게 발각돼 홍경래는 서둘러 참모들을 불러 모아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거병을 18일로 앞당겨 반란을 일으켰다.
거병 당시 다복동에 모인 병역은 남과 북 두 진영으로 나뉘었는데, 남진군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 홍경래가 총지휘하고, 북진군은 부원수 김사용의 지휘 아래 의주방향으로 진격했다.
반란군은 먼저 가산군아를 습격, 가산군수 정시(鄭蓍)를 체포해 동조하기를 종용했으나 그는 끝내 저항하다가 부자가 죽임을 당했다.
이어 반란군은 홍경래가 선포한 격문(檄文)을 선봉대가 점령지역마다 선포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선포한 격문의 내용을 보면, 지방적 차별대우를 평안도의 몰락한 양반, 토호들의 요구가 강력하게 반영돼 있었고,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민의 생활에 끼친 폐단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조선왕조 멸망의 불가피성과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반란군은 점령지역마다 동조하는 지방 세력들의 협조아래 투쟁을 전개한 후 10일도 채 되지 않아 가산,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박천 등 청천강 이북지역을 거의 장악했고, 점령지역의 수장들은 저항 없이 반란군에 항복하거나 관아지를 이탈해 달아났다.
병연의 할아버지인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의 반란군이 거침없이 선천을 밀어닥치자 손 쓸 사이도 없이 검산성(劍山城)으로 피신했다가 반란군이 검산성을 장악하자 그는 밀려오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포로가 됐고, 이어 홍경래의 끈질긴 설득과 함께 끝까지 버티다가 김익순은 끝내 항복하고 홍경래의 사령장을 받아 반란군에 동조했다.
반란군은 계속되는 진격으로 박천을 점령한 후 영변과 안주의 진격순서를 놓고 대립하다가 홍경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홍경래의 요양과 전열수습을 위해 다복동으로 집결해 4일간의 전투를 늦추었다.
이때 정부군은 평안도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가 지휘하는 군사와 중앙에서 파견된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의 정예군이 합세해 반란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의 남진군은 영변과 안주를 공격했으나 실패를 거듭했고, 최후로 남진군은 박천의 송림리에 진을 치고 싸웠으나 관군에게 밀려 참패하고 정주성으로 밀려났다.
1월 중순경 북진군도 곽산의 사송야전투에서 관군에게 패배를 거듭하면서 남은 병력을 수습해 정주성으로 후퇴해 남진군과 함께 전열을 수습했으나 정예화 된 정부군에 맞서 싸울 의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농민층의 투쟁열기를 북돋아주던 지방 세력들이 관군의 반전에 연전연패하는 반란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곧 등을 돌리게 됐고, 반란군은 외부의 지원 없이 정주성안에서 식량난과 군수품의 부족 등을 견디면서 버티다가 1812년 4월 19일 정부군이 성 밑으로 굴을 파고 성벽을 폭파시켜 성안으로 들어가 반란군을 진압시켰고, 홍경래는 최후의 정주성 전투에서 교전 중 사살됐다.
이때 사로잡힌 반란군의 수는 2,983명이었는데, 그증 부녀자와 어린 소년을 뺀 1917명이 모두 효수(梟首)로 처형됐으며, 이로서 4개월이나 끌어오던 홍경래의 난은 첨예화된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패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