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16편]멸족 면한다는 낭보 접하고 곡산을 떠나다

김참봉 2010. 11. 16. 12:00

 

 

 

홍경래의 난이 수습된 지 2년여 만에 기쁜 소식이 함평 이씨에게 전해왔다.

시아버지인 '김익순의 죄는 본인에만 한하고 후손에게 연좌된 죄를 사면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를테면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는 것이다.

그 당시 폐족(廢族)이란 조상이 죄를 지고 처형을 받았을 때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는 족속을 이르는 말이다.

함평 이씨는 이곳에서 집안의 웃어른이 전하는 말을 듣고 곡산에 피신해 있는 병하와 병연이의 목숨을 구제받았음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떠한 고통이 다가와도 두 아들에게 글을 가리켜 멸문지화(滅門之禍)에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리라!' 그녀는 굳은 결심을 다짐하며 다음날 꼭두새벽에 길을 떠나 7일만에 두 아들이 피신해 살고 있는 곡산으로 찾아 갔던 것이다.

함평 이씨는 곡산에 도착해 두 아들과 같이 지냈다.

형제는 2년 전 양주의 본가에서 헤어질 때보다 더욱 성장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당에 거르지 않고 다닌 것이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또한 두 형제를 서당에 보내어 지금껏 뒷바라지해준 김성수 내외에게 더없이 고마웠다.

함평 이씨는 두 형제가 서당에 가고 없는 사이 그들이 지금껏 서당에 다니면서 배운 글들을 꺼내어 보았다.

꽤 많은 분량이었다.

그 많은 분량 중에서 병연이가 복습한 글이 형보다 곱이나 더 많았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에 이어 사략(史略), 소학(小學)으로 이어지는 필체도 제법 숙련돼가고 있었다.

며칠을 더 묵은 함평 이씨는 그곳에 하릴없이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내일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나리라' 작정을 하고 가지고 온 전답문서를 챙겨들고 김성수 내외와 마주 앉았다.

"김씨.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 어린 것들 보살피랴. 더욱이 주위 눈치 보랴. 서당에 보내랴 고생이 많았지요?"

"아씨마님.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당연히 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부사이셨던 대감마님 덕으로 굶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들이 아씨마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지요"

김성수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전처럼 충복의 마음 그대로였다.

함평 이씨는 그의 앞에 이곳의 전답문서와 종 문서를 내어 놓았다.

"이 문서를 받아요. 이곳에 있는 논문서와 밭문서예요. 그리고 이 문서는 아궁이에 넣어 태우도록 해요."

아궁이에 넣어 태우라는 문서는 김성수의 종 문서였다.

"아닙니다요. 이곳 전답은 아씨마님 겁니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아니에요. 지금까지 저 어린 것들을 난세에 감싸주고 길러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이 문서는 선천부사이셨던 아버님의 뜻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사대부의 마님다웠다.

실은 이곳에 있는 전답을 팔아 수중에 넣는다면 함평 이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어디에 가도 굶지는 않을 재산이었다.

그러나 전답문서를 넘겨준 그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내일 길을 떠나겠다고 말해주었다.

이에 김성수는 놀라고 서운한 표정이었으나 더 머물다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계신 곳이 여주라면 쟁쟁한 안동 김씨들이 터를 잡았을 터이고 그곳에서 부족함없이 잘 살고 계시려니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함평 이씨는 일찍 서둘러 행장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김성수 내외는 굳이 동구 밖까지 나와서 작별인사를 했다.

"아씨마님. 가셔서도 내내 강녕하십시오."

김성수는 함평 이씨에게 정중히 작별인사를 드리고 병하와 병연이를 바라보다가 병연이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도련님들. 부디 글공부에 게을리 하지 마시고 큰 벼슬길로 오르십시오."

아무리 위장된 부자지간일지라도 2년여 동안 같이한 정은 모두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선 계수리의 뒷산인 삿갓봉도 다시 볼 수 었는 아쉬움을 남긴 채 이들 모자는 곡산을 떠났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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