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7편]어머니 이씨, 여주와 평창 전전하며 삯바느질 어려움속에서도 글공부 가르치는 것 잊지 않아
곡산을 떠난 지 열흘이 넘어서야 검푸르게 흐르는 남한강이 보이는 여주의 어느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초가집의 사랑채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가 우리가 살 집이란다."
어머니의 나지막한 말이었다.
형인 병하는 양주의 집에서 곡산으로 피신 할 때 집안사정을 눈치 챘는지 현실의 결과에 덤덤한 표정을 지었고, 병연이는 그 당시 너무 어려서 집안사정도 모르는 터라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는 지금껏 곡산의 김성수 집에서 떠나올 때 지난날의 화려했던 양주의 집을 떠올리며 어머니를 따라왔는데 양주와 전혀 다른 낯설은 지역이고 집도, 사랑채의 방안도 어설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두 아들의 표정에서, 특히 병연의 어두운 얼굴에서 실망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지난 날의 호화롭던 양주의 본가를 생각하며 도착해보니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집에다 사랑채 방으로 들게 되었으니 그의 실망은 더욱 컸으리라, 이럴 때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무어라 말을 해줘야할지 난감했다.
"얘들아. 곡산에서도 살아봤지만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란다. 사람이 살아가는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거야. 하지만 남보다 앞서서 글공부를 열심히 하면 과거시험에도 오를 수 있고 큰 벼슬도 할 수 있단다. 앞으로 이 어머니가 지필묵이랑 배울 교재도 마련해서 글을 가르쳐 줄 터이니 열심히 글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비장한 각오로 두 아들에게 물었다.
"네. 어머니! 명심하겠사옵니다."
어머니는 두 아들의 의중을 확인한 후 날품팔이, 삯바느질 등의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그러나 고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공부를 가르쳤다.
함평 이씨가 곡산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이웃의 눈치들이 범상치 않았다.
일거리도 지난날보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할 즈음 함평 이씨가 하루의 고된 품팔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먼 친척뻘 되는 웃어른이 함평 이씨를 불러 세웠다.
"이 사람아! 지금 자네 집안처지를 아는감? 동리 사람들이 역적의 자식이니 폐족이니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자식 놈들이 동구 밖 나루까지 어슬렁거리니 남부끄럽지 않나? 내말 명심하게. 앞으로 친척이니 뭐니 발길을 자제하고 근신하도록 하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말투였다.
그러지 않아도 역적의 자식이니 폐족의 자식이니 손가락질을 받는 터에 그도 집안의 웃어른뻘 되는 사람이 손자뻘 되는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눈으로 대한다는 것에 억장이 무너졌다.
함평 이씨는 두 아들의 장래를 위해 어떠한 모욕적인 말에도 반응하지 않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멸족이라는 커다란 형벌에서 이미 나라의 조정에서 폐족으로 사면은 됐지만, 오명 전체가 병연의 가족에게 불명예를 씻어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역적이니 폐족이니 하는 입소문이 들려올 때면 함평 이씨는 본능적으로 지금까지 숨겨온 집안내력을 두 아들이 눈치를 챌까 몸서리를 치게 했고, 그것은 잦은 이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함평 이씨는 이곳에서 6개월을 겨우 버티고 한나절 거리인 이천으로 이주해 1년을 겨우 살다가 가평의 북한강변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도 같은 이유로 2년을 거주하다가 평창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평창에서도 영주(永住)할 곳은 못됐다.
이곳에서 재물께나 있고 김진사댁이라 불리는 안동 김씨 집에서도 김병연의 이름에서 조부가 김익순이라는 것을 캐내어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그 집 하인배들의 입에서 집밖으로 새어나와 동리에 소문이 퍼지게 됐다.
그 지긋지긋한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역병(疫病)처럼 퍼져나갔고, 이로 인해 이웃과 소외되는 것이 무서운 형벌보다 더 가혹했고 몸서리를 치게 했다.
함평 이씨는 또다시 짐을 꾸리고 병연이가 14살 되던 해에 두 아들을 데리고 영월부의 삼옥리로 이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