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南皐:1807.4.8-1879.1.7)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초휘(初諱)는 택환(宅煥) 자는 중원(仲元, 初字는仲安) 호는 시암(時庵, 初號는遯庵) 당호는 노백당(老栢堂)이다. 거창부사 만취헌 남노명(南老明)의 6대손으로 아버지 남유노(南有魯)와 어머니 대흥백씨 사이에 차남으로 1807년 4월8일 경상도 영해부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4살때 부터 글방에 나아가 천자문을 배웠는데 공부하는 태도와 행동이 항상 스승을 놀라게 했다. 7세때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사자(四子)에 통달하였고, 8세때 주자여진시랑장서(朱子與陳侍郎長書) 3편을 6․7회 반복해서 외워도 한 자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10세 에는 논어(論語) 등 성리서(性理書)에 깊이가 있었다. 순조7년 서기1840년3월 34세로 생원시에 급제한후 고향 원구리로 돌아와 1849년(헌종 15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花田, 꽃밭) 대둔산(大遯山) 기슭에 산 이름을 따서 대둔정사(大遯精舍)를 건립하여 학문의 전당(殿堂)으로 삼았다. 당시 족친(族親) 영해부사(寧海府使) 우촌 남상교(雨村 南尙敎), 이종상(李鍾祥), 류치호(柳致鎬), 김대진(金岱鎭), 이돈우(李敦禹), 이만각(李晩慤), 배선원(裵善源), 류긍호(柳肯鎬), 류기호(柳基鎬), 권연하(權璉夏), 박시묵(朴時黙), 남공수(南公壽) 등과 학문교류 및 서신 등을 왕래하였고, 또한 졸수재(拙修齋) 류정호(柳廷鎬), 구간헌(九干軒) 박영수(朴榮秀), 경암(敬庵) 백규(白煃), 족제(族弟) 남계환(南啓煥), 남건(南健), 조카 남효근(南孝根) 등 수많은 후학과 인재를 배출하였다.
시암(時庵)선생은 퇴계 이황의 적전제자(嫡傳弟子)인 병조참판 동지춘추관사를 지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운문(韻文)과 시(詩)에 능하였다. 선생은 퇴계학(退溪學)의 재전제자(再傳弟子)로서 영해향리는 물론 안동 청송 경주 울진지방까지 대학자로 칭송이 자자하여 세칭 해방사표(海防師表) 시암(時庵)선생으로 불리웠다. 특히 정재선생은 시암선생의 학문을 “고귀(高貴)하고, 정심(整心)하며 해박(該博)함이 금세(今世)의 제일”이라고 칭송하고 이것을 기문(記文)하여 학서(鶴棲)란 현판(懸板)으로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논어집주고증(論語集註考證), 효경연의(孝經衍義), 치평귀감(治平龜鑑), 곤면록(困勉錄), 비국어변(非國語辯), 금란록(金蘭錄), 추원지(追遠志) 외30편이 있으며 유고집으로 시암선생문집(時庵先生文集)15권8책이 있다. 묘소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원창수(울티재입구)에 있다.
시암집(시암선생문집-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위탁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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