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땅에 김한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녀(處女)고 유부녀고 가리지않고 얼굴만 반반하면 수하(手下)의 잡놈들을 시켜 끌고와 겁탈(劫奪)을 했다.
겁탈당한 여자들의 자살(自殺)이 이어졌다.
이 고을 사또라는 위인은 빗발치는 민원에 김한을 찾아와 그 앞에 꿇어앉아 한다는 말이 "어르신, 제발 유부녀 만은...." 보료에 삐딱하니 앉아 장죽(長竹)을 문 김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건방진놈, 네놈 할일이나 하지 쓸데없이 참견이야, 썩 꺼지지 못할까." 나주 사또는 김한의 눈 밖에 나 옷을 벗고 물러났다. 도대체 김한은 누구인가? 연산군(燕山君) 애첩(愛妾)의 큰오빠였던 것이다.
박눌(朴訥)이라는 신관사또(新官使道)가 부임하러 나주(羅州)땅에 들어섰건만 누구하나 마중나오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신관사또의 기(氣)를 꺾으려는 김한의 농간(弄奸)이었다. 동헌(東軒)에 들어오자 이방(吏房)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나으리,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신것 같은데 이거라도 들고 먼저 인사를 가시지요." 박눌(朴訥)은 보따리를 걷어차며 고래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당장 김한이란 작자(作者)를 잡아 오렸다." 천하의 김한에게 인사가기는 커녕 잡아오라 대갈일성(大喝一聲)하니 앞으로 닥칠일이 눈앞에 선해 육방관속(六房官屬)이 모두 벌벌 떨고 있었다. "내말이 들리지 않느냐!" 다시 호통을 쳐도 고개만 숙일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놈 집 마당에 형틀이 있다지." 사또 박눌(朴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방을 앞세워 김한의 집으로 가자, 관속과 포졸들이 뒤따랐다. 박눌이 김한의 안마당에 들어서자 마루에선 김한이 두눈을 부릅뜨고,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며 사또에게 고함을 쳤다. 사또가 단숨에 뛰어 올라가 김한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 형틀에 묶고 형방(刑房)에게 곤장(棍杖)을 치라 명했다. 얼떨결에 형틀에 묶인 김한이 "네놈 사또옷을 당장 벗기리라."악을 썼다. 형방이 곤장을 들고 벌벌 떨자, 사또가 빼았아 떡메치듯 곤장 스무대에 김한은 똥을 싸며 뻗었다. 찬물을 퍼부었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황천(黃泉)길로 가 버렸다. 김한이 신관사또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주(羅州)백성들은 밤새도록 꽹과리를 울리며 춤을 첬다.
일은 크게 벌어 졌다. 그날밤 육방(六房)이 사또앞에 엎드려 "사또 나으리,변복(變服)을 하고 멀리 행적(行跡)을 감추십시요. 여기 노잣돈을 마련했습니다." 박눌(朴訥)의 대답은 단호(斷乎)했다. "필요 없다"
이튿날 아침, 나주 사또 박눌(朴訥)은 당당하게 연산군에게 고하고 사약(死藥)을 받을 참으로 집사(執事)만 데리고서 말을 타고 상경 길에 올랐다.
애첩의 큰 처남이 사또의 태장(笞杖)에 절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산군은 펄펄 뛰며 사헌부 관리를 나주로 보냈다. 그들은 엿새만에 나주에 도착해 "사또 박눌은 빨리나와 사약을 받으라."고 고함을 첬지만 박눌은 없었다.
한편 서울에 도착한 박눌은 간발(間髮)의 차이(差異)로 남대문(南大門) 문이 닫힌지라 그날 밤은 성(城)밖 주막집에서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평생 대리고 다닌 집사(執事)에게 "함께 화를 당할지 모르니 너는 이 돈을 가지고 네 고향으로 내려가거라. 날이 밝으면 나 혼자 조정(朝廷)으로 들어가 사약(死藥)을 받으리라." 집사는 박눌(朴訥)에게 술 한잔을 올린후 큰절을 하고 말없이 닭똥같은 눈물만 떨구었다. 이튿날 아침, 간밤에 마신술로 주막(酒幕)에서 아직 자고 있는데 집사가 뛰어들었다. "나으리, 세상이 바뀌어 졌습니다."
간밤에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9월2일)으로 연산군은 폐위(廢位)되어 강화도(江華島)로 쫓겨나고 중종(中宗)이 등극(登極)했던것이다.
박눌(朴訥)이 서둘러 한성으로 돌아오니 새 임금 중종은 부제학(副提學,정3품)을 그에게 제수했다.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죽음은 그를 비켜가버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일설에는 박눌(朴訥)은 그날 밤 술을 너무 마셔 중종(中宗)을 알현했을때 아직도 취중이였던지라, "소신이 나주로 떠날때 뵈온 용안과 지금의 용안이 다르니 이 어쩐 일이옵니까?" 라고 실언하여, 그 바람에 새 임금 중종과 주변 신하들이 웃었다는 이야기...
(여기서 박눌(朴訥)이 나주사또로 나오지만 정식 관직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맞다)
눌재(訥齊)는 박상(朴祥)의 호인데 그래서 박눌재(朴訥齊)라 부르기도한다. 여기서 "재(齊)"자가 사라지고 "박눌(朴訥)"로 변한것으로 생각된다.
*박상(朴祥,1474∼1530)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시인으로 유명하였다.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齊),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충주(忠州)로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496년(연산군 2년)진사에 급제하고 1501년(연산군 7년)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26년(중종 21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교서관 박사(博士)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병조좌랑, 전라도 도사(都事), 사간원 헌납, 한산군수(韓山郡守), 홍문관 응교, 담양부사(潭陽府使), 순천부사(順天府使), 선공감정(繕工監正), 상주목사(尙州牧使), 충주목사(忠州牧使), 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는 <눌재집訥齋集> 8권이 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의 월봉, 순창의 화산, 담양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박상(朴祥)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으로 인하여 외척과 공신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그 결과 국왕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관료생활의 대부분을 수령으로 보내야 했는데, 임지에서는 민생 침해를 일삼는 토호 향리를 가혹하게 응징하곤 하였다. 그가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는 의로운 인물이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우부리 장살사건”이다.
1506년 외직으로 전라(全羅) 도사(都事 -관찰사를 보좌하여 감사(監司)와 함께 수령(守令)을 규찰하고 문부(文簿)를 처결하며, 觀察使 유고시는 그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여 아감사(亞監司)라고도 불렸다)가 되어 나주 금성관에서 연산군의 후궁의 친정 아버지(우부리)가 연산군의 권세를 믿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남의땅을 빼앗고 뇌물을 받아챙기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던 나주 천민으로 포악한 짓을 너무 많이 하였기 때문에 곤장으로 때려죽인다. 그는 형벌을 면 할 수 없으니라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데 다행히 중종반정이 일어나 박상은 살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연산군이 전국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조선 연산군때 미녀와 좋은 말을 궁중에 모으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하였던 벼슬아치)를 내려보내 미녀사냥을 하던 중 나주골에 사는 천민 우부리(牛夫里,황쇠부리(黃牛夫里))의 딸이 간택되어 후궁(숙용:淑容,종3품)이된다. 그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 아비 우부리가 연산군의 권세를 믿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첩으로 삼는 등 패악과 부정부패를 멈추지 않으니 민심이 날로 흉흉하였는데 그곳 나주목사는 물론 전라도 관찰사조차도 그에게 거스르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다. 서울에서 벼슬을 살던 눌재 박상(朴祥)은 이 사실을 알고 전라도 도사(都事)를 자원해 부임해왔다. 전라도사로 부임해 왔을 당시 동료나 예하 이속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부리에게 부임인사를 해야한다고 했으나 박상은 그 권유를 듣지않고 오히려 우부리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그를 동헌으로 잡아들였다. 그에게 죄를 묻고 심문한 결과를 조정에 보고할 예정이었으나 우부리가 기세등등하게 "목사이놈, 네놈의 목을 자르겠다"고 오만방자하게 큰소리를 치자, 박상은 나주 금성관 뜰에서 곤장을 쳐 죽이는 장살의 형벌로 그를 죽였다. 이는 연산군 폭정아래 죽음를 각오한 결심이였다. 이일이 있은후 우부리의 집에서는 장례치를 생각도 못하고 서울로 급히 고변을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 길길이 날뛰었다. 왕명으로 금부도사(의금부도사)가 사약을 갖고 나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한편 눌재공은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낱낱이 밝히는 동시에 당당히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려고 즉시 상경길에 나섰다. 바로 전라관찰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전남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거리며 바지가랑이를 물어채기에 이상히 여겨 오라는대로 따라갔다. 고양이를 따라 도착한곳은 금강산 정양사였는데, 바로 그때 금부도사가 반대쪽 큰길로 서로 길이 엇갈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얼마안가 중종반정(1506년9월2일)으로 그 사건은 불문에 붙이게 됐다(脚註:중종반정이 성공하게된 이유는 그가 왕의 장인을 때려죽인 이 사건에 조정의 모든 이목이 쏠린 덕분이라는 견해도 있다)
눌재공(訥齋公)은 그 은공을 잊지 않기위해 광주 광산구 오산동(또는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에 수십두락의 땅을 사서 묘답(苗畓-고양이의 은혜를 갚는 논)이라 이름붙이고 거기서 나온 소출을 매년 강원도 금강산 정양사에 공양했다. 눌재 박상의 후손들은 고양이를 은혜로운 동물로 여겨 특히 귀여워했다고 전한다. 공양은 조선조가 망할 때까지 후손들이 계속했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에게 역둔토(주인없는 땅이라 국유화한다는 뜻)라며 묘답을 몰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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