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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뜻하는 솔롱고스 몽골사람들은 언제부터 말하였나? 몽골에 나타나는 고구려 유적들

김참봉 2022. 2. 8. 23:29

한국은 몽골의 한 부족인가?  몽골은 한국의 한 부족인가 ?

몽골 학자 바트술해(Batsuuri)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5세기부터 활발히 교류해왔으며 400년 몽골의 니런(Nirun) 지방과 고구려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479년 니런 군주와 고구려 군주는 만주 디고간(Digogan) 지방을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몽골 학자 달라이에 따르면, 400년대 중반에 고구려(또는 부여)를 지칭하는 '솔롱고스'라는 명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되었다고 한다.(주11)

오치르(Aio`dync Oehir) 교수는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하는데 17세기 말까지 메르키드(Merekid), 발가(Barga), 부리야트(Buryat) 등의 몽골 일부 부족을 역시 솔롱고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그들의 종족의 일부가 한반도까지 남하하여 까우리(Khori : 코리)의 나라인 코리어(Korea)를 건설했다고 믿고 있다.

현대 몽골의 대학 교재나 교양서적에서는 몽골 지역의 고대유목국가의 역사를 기술할 때 그들의 영토 중 동쪽에 접하는 나라로서 '솔롱고스'를 기록하고 있는데 원나라 시대를 기록할 때에는 '솔롱고스'와 '고올리(高麗 : Korea)'라 섞어 쓰고 있다. 이 때 솔롱고스나 고올리는 모두 한국을 뜻하는데 시기적으로는 고조선 - 부여․고구려 - 통일신라 - 고려 등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흉노(匈奴), 선비(鮮卑), 돌궐(突厥) 등의 북방유목제국과 동쪽으로 경계를 지는 나라로서 솔롱고스를 언급하고 있다. 이 때 솔롱고스는 '부여' 때로는 '고구려'이다.(주12)

부여와 몽골은 동류

몽골은 8세기 무렵 아무르강 상류인 에르군네(Ergüne)하(河) 유역에서 몽골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당(唐)과 위구르 등이 와해되는 틈을 타서 지속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11∼12세기 무렵에는 오난江(Onan河) 일대까지 진출한다. 오난강(江)으로 진출한 몽골은 케레이드(Kereyid), 메르키드(Merekid), 타타르(Tartar), 나이만(Naiman) 등의 부족들과 서로 다투면서 성장하다가 1206년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이들을 통일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한다.

공식적인 사서들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는데, 동호들 가운데 남부 사람들이 거란(契丹 [쇠단 ?])이 되었고 북부 사람들이 몽골(실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나라 때에는 현재의 흑룡강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때 몽골 또는 머골(蒙兀)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몽골과 거란은 동호(東胡) → 선비(鮮卑)·오환(烏桓) → 거란(남)·실위(북) 등의 계통을 밟는다. 여기서 실위(室韋)가 바로 칭기즈칸의 몽골과 직접 관련이 있다.

실위(室韋)는 <위서(魏書)>에 처음 등장하는데 실위(失韋)라고도 쓰지만 수당대 이후 실위(室韋)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실위라는 말이 몽골어의 '삼림(Siγui[시귀])'에서 나왔다고 보지만, 서양 선교사 연구자인 펠리오(P.Peliot)는 선비(鮮卑)에서 나온 말로 보고 있다.(주13) 만약 실위가 몽골어의 삼림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 말은 만주족들을 가리키는 물길(勿吉[웨지] : 만주어로 삼림)이나 왜(倭[와]), 옥저(沃沮[오쥐]) 등과도 다르지 않다.

 

<수서(隋書)>에는 "실위는 거란의 한 종류이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거란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을 실위라고 부른다."(<隋書>「室韋傳」)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실위전(室韋傳)」에는 "실위는 거란의 별종으로 … 황룡부(금나라 수도) 북쪽에 있고 … 적게는 천호에서 많게는 수천호로 하천과 계곡 근처에서 흩어져 살며 … 비록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지만 강국이 되지 못했다."라고 한다. 이들은 "때로 모여서 사냥하고 일이 끝나면 흩어졌다.(<구당서>)"고 하는데 그래서 <신당서>에서는 신속(臣屬)이 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每戈獵卽相嘯聚 事畢去 不相臣制)고 했다. 즉 당나라 시대까지도 이들은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의 장지우허(張久和)는 "실위는 당연히 선비(鮮卑)의 후예지만 탁발 선비의 귀족들이 이들처럼 정상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들과 분리하여 실위라고 했다."고 한다.(주14) 즉 동족(同族)이라도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잡거(雜居)하였기 때문에 실위라고 했는데 일종의 비칭(卑稱)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예맥(濊貊)이라도 고구려인이나 부여인(夫餘人)들은 잡거하는 예맥과 분리하여 서술한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거란과 해(奚)의 경우도 동일하다. 해(奚)는 거란의 원류지만 거란이 국체로 형성되었을 때는 일종의 거란 변방인 실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344년 선비족들 내부에서 모용부(慕容部)가 우문부(宇文部)를 정벌하자 우문부의 일부가 달아나 송막[松漠 : 현재의 시라무렌(西拉木倫) 및 랴오하(老哈河)강 일대의 천여 그루 송림 지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 때 이들의 명칭이 거란, 고막해 등이었다.(주15)

그런데 <위서(魏書)>에는 북부여의 후예들인 두막루(豆莫婁 또는 달말루 : [더모로?])가 실위의 동쪽에 살았는데 <신당서>에서는 "고구려가 부여를 멸하여 유민들이 나하(那河 : 현재의 눈강과 제1송화강)를 건너 그 곳에 거주했다."(<新唐書>「東夷傳」)고 한다. 즉 부여의 후예(두막루)가 실위의 거주지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실위가 눈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부여의 유민들과 실위인(거란, 고막해)들이 섞여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16)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서>에서 "거란, 고막해(실위), 두막루의 언어가 같다.( <魏書>「室韋傳」)"고 한 것이다. 언어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부여 및 고구려(부여의 별종) 등과 이들 실위가 다른 민족들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부여나 고구려와 실위가 같은 종족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다가 이 시기에 합류한 것이고 그 지역이 바로 눈강(嫩江, Nèn Jiāng) 유역이었을 뿐이다.

남북조 시대에 두막루는 실위의 동쪽에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달말실위로 불렸다.(주17) 즉 부여의 후예들도 실위로 불렸다는 것이다. 결국 고구려계(부여계)와 동호계인 실위가 민족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서>에 따르면, 남북조 시대의 실위는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실위의 일부가 쿨룬 부이르 초원과 음산산맥 북부, 몽골 고원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기르는 가축 수가 크게 증가하고 양(羊)과 같은 새로운 가축 품종을 기르기 시작했다. 몽골 쪽으로 이동해간 실위는 이전의 수렵과 어로(漁撈), 일부 농업 등의 경제에서 대규모 유목경제(遊牧經濟)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9세기 중반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들은 <자치통감(資治通鑑)>, <당회요(唐會要)>, <책부원귀(冊府元龜)>,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상세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요나라 시기(10∼11세기)에서는 말과 낙타 등에 대한 대규모의 세공(歲貢)들이 나타나고 있다.(주18) 10세기 초에 이르면 일부 실위 부족들은 유목을 위주로 하고 사냥으로 보완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 실위 부족들의 분포도.張久和(2009, 그림 화보)에서 재구성 ⓒ김운회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실위는 상당한 수준의 금속 제련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오대사>에서는 "그들은 솜씨가 좋아서 구리와 철로 만든 여러 그릇들이 모두 아름답고 훌륭하였다."라고 하였다(<新五代史> 卷74 「四夷附錄第二」 胡嶠陷虜記).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기존의 거주방식인 소거(巢居 : 여름)와 혈거(穴居 : 겨울)로 부터(<隋書>「室韋傳」) 게르(Ger : 몽골 천막)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사료는 <요사(遼史)>인데, "(901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실위 등의 부락들을 정벌하고 천막을 노획하였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遼史>卷34「兵衛志上」) 바로 이런 터전 하에서 몽골 제국이 기지개를 켰던 것이다.

쇠는 모든 한국인의 심볼

<수서(隋書)>나 <북사(北史)> 등에 따르면, 거란과 실위는 기원이 같고, 남부인들을 거란, 북부인들을 실위라고 한다고 했다. <위서>에는 "실위의 언어는 거란, 고막해, 두막루와 같다( <魏書>「室韋傳」)"고 하고 <요사>에서는 "거란이 해(奚)와 언어가 서로 통하니 사실상 하나의 나라다.(<遼史>卷73「耶律曷魯傳」)"라고 한다. 그러면 이들의 민족 또는 국가 명칭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지 알아보자.

몽골의 원류인 동호계(東胡系)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 거란 원류지만 거란이 국체로 형성되었을 때는 일종의 거란 변방인 실위와 동일하게 취급),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과 아무르, 북만주 지역 - 몽골 원류) 등인데(주19), 이 한자 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iron - 鐵)]에 가깝게 나타난다. 즉 해(奚)는 씨[xī], 실위(室韋 shiīwéi : 반절법으로는 式質切)는 정확한 당시의 발음은 알 수 없더라도 [쇠] 또는 [시에] 등으로 추정되므로 일반적인 한국인을 의미하는 쉬(濊 : 예) 또는 쉬모(濊貊 : 예맥)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 가운데서 해(奚)는 거란(契丹)이 되고 실위(室韋)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 한다.(주20)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바치신 박시인 선생은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골(蒙兀)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라고 분석하였다.(주21) 쇠는 태양의 다른 형태로 땅속의 태양을 의미한다. 쇠는 유목민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쇠의 가장 고귀한 형태가 바로 금(金)이다. 금은 인간의 역사가 존재했던 한 화폐이며 보물이었다. 중간 상인이자 금은 세공업자였던 알타이 중심의 유목민들에게는 청동기 기술과 금은 세공 기술의 개발과 유지 발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부(富)의 원천이었다. 현대로 말하면 최고의 부가가치를 지닌 ICT나 반도체 산업에 해당되는 최첨단 기술이자 산업이었다. 금은 가벼운 데 비해 워낙 고가에 거래되므로 이동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더 없이 유용한 산업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쥬신을 찾아서(2006)>에 충분히 해설되어있다).

<신오대사(新五代史)>는 거란과 동류인 "쉬[奚(해)]는 본래 흉노(匈奴)의 별종", <북사(北史)>는 "쉬[奚]는 거란(契丹 : [쇠단?])과 이종동류(異種同類)로 본래 고막해(庫莫奚 [구모쉬?])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東胡)의 우문(宇文)의 별종"이라고 한다. 요(遼)나라의 태조(太祖)가 쉬[奚(해 : 거란인들 가운데 잡거하고 있던 사람들)]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쉬[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라고 했다.(주22) 요나라는 거란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다.(주23)

▲거란(쇠단) 발상지. ⓒ김운회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거란[쇠단]은 5세기 무렵 시라무렌(Siramuren) 강변 일대에서 발원한 몽골족계의 유목민족으로 원명은 키타이(Kitay[쉬타이])이며 그 뜻은 '(쇠)칼날'이라고 한다. 거란[쇠단]은 정복왕조(Conquer Dynasty)의 효시라고 불릴 만큼 초원의 전통 제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이념을 창출했다. 거란[쇠단] 제국의 창시자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야루 아버지?(father of Yalu?)])는 초원민족의 전통인 샤머니즘을 시대이념의 중심으로 삼았고 흉노 이래의 전통인 직접 참여민주주의 전통 즉 무엇을 하던 간에 다수가 모여 반드시 먼저 하늘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를 의무화했다. 이러한 시대 이념을 통해 거란[쇠단]은 초원민족들의 자발적인 귀부를 받으며 놀라운 속도로 몽골고원을 평정해 갔다. 당시 서양 사람들은 동아시아 자체를 키타이(Kitay) 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눈에는 거란[쇠단]이 바로 동아시아 지역의 대표주자로 보였던 것이다.(주24)

흉노는 알타이를 중심으로 거주한 포괄적인 유목민 집단으로 한국인, 몽골인, 터키인 등으로 분리되기 이전 단계의 선민족(先民族)으로 볼 수 있다. 흉노의 군주는 동방계 유목민족들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자신을 '하늘의 아들(Tenggeri kotu)'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 구도에 맞추어 유라시아세계에 관통하고 있었던 자연법적 인식체계를 신격화된 하늘(Tenggeri) → 흉노의 군주 → 백성이라는 3분 구도로 체계화시켰다. 흉노의 군주는 유능한 군사령관이자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최고 사제(司祭)로서의 지위를 거머쥔 것이다.(주25) 단군왕검(檀君王儉)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이다.

몽골에 나타나는 고구려 유적들

시간이 흐를수록 몽골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몽골 지역에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 즉 맥족의 고올리(高句麗) 성읍터나 구비전승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고올리 즉 '모골' 또는 '머골'에서 몽골이 나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맥족의 고올리란 맥족의 나라라는 뜻이므로 고구려나 부여, 백제와 별도 다르지 않다.

▲고올리의 성읍터. ⓒ김운회

몽골 학자 수미야바타르(Б.Сумъябаатар) 교수는 보이르호 남쪽호반에 서 있는 고올리칸 훈촐로를 동명성왕상(東明聖王像)이라고 주장한다. 박원길 교수는 고구려가 기원적으로 몽골과 유사성을 가진 민족으로 원래 코리(Khori)족 또는 맥족(貊族)이 남하하여 만든 국가라고 한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코리족(Khori : 솔롱고스)이란 동몽골의 광활한 대초원인 메네긴탈(Menengintal)에 살던 민족으로 케룰렌(Kerulen) 강과 할하(Halh :Халх) 강 유역에서 동북대평원 멀리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일대를 경유하여 남하한 부족들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Buryat)족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Khori : 솔롱고스)족의 발원지로서 보고 있으며, 이 부리야트(Buryat)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김병모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이 종족이 한국인들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고 한다. 강길운 교수(언어학)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사용한 몽고계 언어는 부여어로 부리야트 방언의 고대어로 추정되며 부여는 Burit(Burya-tu 사람)의 Burya[부리야]를 의미하고 그것은 몽골족의 한 갈래라고 주장하였다. 강길운 교수는 108개의 고구려 지명들 가운데 몽골계가 68개가 대응하고 있으며 만주어(滿洲語)와는 31개, 터어키어와는 30개, 길략어와 가야어(伽倻語)와는 13개가 대응한다고 분석하였다.(주26) 몽골 연구가인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이런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이야기로 이 지역 사람들은 동명왕을 코리(Khori)족 출신의 고구려 칸(Khan)이라 부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