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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암 김상준의 영광군수 재직기간(임진왜란 난중일기 강항)

김참봉 2022. 9. 13. 15:22

휴암공의 영광군수 재직기간은 1595년6월~1597년8월이 정확합니다.

15954월 강원도 순안어사에서 파직당하고 얼마안있어 15956월에 영광군수로 임명되셨고(전임군수 정연) 햇수로 3(1595.6~1597.8)근무하시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15978월에 관찰사의 종사관으로 가시게 됩니다.

*전임 영광군수 정연(丁淵)은 임진왜란때 맹활약한 정걸장군의 아들이다.

*정걸(丁傑, 1514~1597)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 본관은 영광이다.  1544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역임했다. 을묘왜변때 해남·강진 등지에 출몰한 왜구를 무찌른 공을 세워 남도포 만호가 되었다. 이후 부안현감, 온성부사, 종성부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우수사, 장흥부사, 전라병사,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78살의 노장으로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이 되어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을 도왔다. 행주대첩과 서울 탈환전에도 충청수사로서 수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1593년 전라도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7년 8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영광군수를 지냈던 아들 정연(丁淵)과  무안현감을 지낸 손자 정홍록(丁弘祿)도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도 3번 언급되고있는데 번역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난중일기(병신년15969월 음력)

9 7 [양력 10 27]<경자> 맑다.    나주 감목관 나덕준(羅駿) 및 무안현감(남언상) 함께 민폐에 관한 이야기했다. 한참 있다가 정대청(鄭大淸)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청하여 앉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떠나 다경포(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이르러  영광군수(김상준)와  함께 밤 열시쯤이나 되게 이야기했다. 

9 8 [양력 10 28]<신축> 맑다.    나라제삿날(世祖 祭祀)인데도 오늘 새벽에 조반(早飯)에 고기를 올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먹지도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감목관에 이르니  감목관과 영광군수(김상준)가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술 두어잔을 마셨다. 저물어서 동산원(東山院:무안군 현경면 옹산원;瓮山院)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李公獻)의 딸 여덟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이 같이 와서 알현했다. 이공헌(李公獻)을 곰곰히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수경(水卿)은 곧 이염(李琰)의 집에서 내다 버렸는데,(이공헌이) 얻어다가 기른 아이이다. 

9 11 [양력 10 31]<갑진>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辛慶德)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김상준)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이때 산월(山月)도 와서 보고 술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 

 

*종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이광정의 종사관 수은 강항(1567-1618)과 함께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선조실록 기해년15994월 음력) 

 

*강항(姜沆:1567-1618)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좌찬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1588(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南原)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관찰사의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고, 남행(南行)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 오사카[大阪]로 끌려가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곳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적정(敵情)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하였다. 1598년 교토[京都]에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적정을 적어 밀송(密送)하고, 160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1602년 대구교수(大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포로로 일본에 있을때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 1561~1619)]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많은 명유를 배출시켰다. 그림에도 뛰어나 인물화와 송화(松畵)에 특기가 있었다.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수은집(睡隱集)》 《간양록(看羊錄)》 《운제록(雲堤錄)》 《건거록(巾車錄)》 《강감회요(綱鑑會要)》 《좌씨정화(左氏精華)》 《문선찬주(文選纂註)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