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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리티...

김참봉 2022. 11. 8. 12:07

너리티...

- 글 중 나오는 ‘어주자(魚舟子)’라는

사람은 작가(조정래) 본인이다. -

서울을 출발하여 두 시간 정도

달려 구름이 저만치 중턱에 걸려있는

문경새재를 넘었다.

90을 바라보는 부모님들이

아직 산골에 사시니 자연 이런저런

일로 자주 문경 새재를 넘어가게 된다.

문경에 잠시 들러서

붉은 오미자 막걸리를 서너병 사서

차에 넣고 다시 예천 읍내로 차를 몰았다.

아들이 간다고 하면 이런저런

음식장만을 하는 수고를 나이 드신

어매가 해야 하니 가능한 저녁은

먹고 집에 가는데 오랜만에 예천

읍내서 매운 면을 먹고 갈까해서다

매운 면은 전국서 유일하게

예천에서만 먹을 수 있다.

용궁을 지나면서부터 눈발이

날리더니 예천 삼거리에 도착하자

낡은 시골 중국집 간판 위로

흰 눈이 휘날리는데 간판이 잘 보이지

아니할 정도로 눈이 날렸다.

다행히 초겨울인지라 눈은

내리자 말자 녹아서

그리 빙판길은 아니다.

중국집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테이블에는 얼굴 시커먼

농부 두 분이 앉아서 매운 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계셨다.

자리에 앉아서 매운 면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그때다,

허리가 굽어 키가 초등학교 오학년

정도의 작은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한눈에도 육신이 오랜 세월 다하여

기력이 많이 떨어진 그런 모습이신데...

더욱이 입으신 옷이 수년간 음지에서만

말린듯하고 등에는 빛바랜

보따리를 들고 계셨다.

요즈음 좋은 가방들이 많아서

시골 할매들도 웬만하면 등산 가방이나

혹은 신식 여성 가방을 들고

장에 오시는데 키 작은 할머니는

천으로 된 보자기를 안고

들어오셨다.

들어오시면서 한숨 한번 몰아쉬시더니

가만- 가만 메뉴판 앞으로 걸어가

한참을 보시더니 혼자서 매운 면을

주문하고 앉아 있는 어주자를 보시더니

"저-어 선상님 이중 기중 싼 게 뭐잇껴?"

물어 보신다.

기중 싼 거...

오오, 참으로 오랜 만에

들어보는 우리 토속어다.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시고 엉거주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저에게 그런 질문하시는 것은,

혹여 먹거리가 비싸면 도로

식당 문을 나가실 그런 표정이시다.

"할매요! 내가 기중 싼 거

찾아 드릴 터이니 우선 추분데

이 난로 옆에 쫌 안즈시소!"

나는 안다... 키작은 할매

표정을 보면 글을 모르시는 분이다.

할머니는 메뉴판 중에

가장 값이 싼 우동을 시키셨다.

그리고 보따리를 페인트가 벗겨진

중국집 의자 옆에 내려놓으시면서

아주 낮게 또 한숨을 쉬셨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 할머니는 마치 눈 내리는

저녁처럼 금방이라도 우실 것

같은 표정이시다.

무슨 마음에 병이라도

있으신 듯 하기도 하고

아니면 몸져누워 계시는 할아버지 일로

고달픈 여생이 아닐까,

그런 추측을 낳게 하는 표정이시다.

표정이 너무 슬프시니

달리 말을 걸지도 못하고

나는 먼저 나온 매운 면을

먹기 시작하고... 할머니는 조금 늦게

우동을 받아 드시고는 우선

두 손으로 우동 그릇을 들어

뜨거운 물을 후르륵 마시고는

식탁에 내려놓고 젓가락 드실

힘도 없으신지 드시는 것도

여릿여릿 이시다.

그 사이 옆자리 얼굴 검은 농부들은

소주 한 병을 추가 했고,

소 사료 값이 너무 올라간다며

삶의 고달픔을 텅 빈 마구간처럼

허허롭게 토해내면서

작은 소주잔을 핏줄 선 목 줄기

안으로 연거푸 털어 넣었다.

철가방을 든 배달군은

오토바이 시동을 끄지도 아니하고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매운 면 5인분,

고평 갈 꺼 다 됫니껴?"

주방 쪽을 보고 소리치고

중국집 주방에서는 방금 전화주문 들어온

짜장면 수타면 치는 소리가 탕탕 거렸다.

창 밖에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작은 똥개가 두 마리가 이리저리

신나게 뛰고 있었다.

매운 면을 다 먹고 방금 오토바이로

배달을 마치고 돌아 온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낮은 소리로

"저 할매 우동 값도 지가 냄시더" 하자

중국집 주인은 할머니를 한번 보시고

어주자를 힐끗 쳐다보시더니

"저 할매 우동 값을

사장님이 대신 내 드릴라니껴?"

말했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할머니 우동 값까지

치르고 잔돈을 받아서

매운 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예천 읍내로 차를 몰았다

부모님에게 갖고 갈 고기를

사고 싶어서다.

휘날리던 눈발은 내성천 다리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다시 하늘로 치솟다가는 다시

강물 위로 떨어지더니

금방 물속으로 사라졌다.

읍내에 들어가서 그 유명한

예천 한우 고기를 몇 근 사서

예천 다리를 건너서 다시

삼거리로 빠져 나오는데

날이 이미 많이 어둑어둑 해졌다

다시 삼거리 중국집 앞을 지나가는데

잿빛 눈이 성성하게 날리는

도로 위에 조금 전 중국집에서

한숨을 쉬시면서 우동을 드시던

키 작은 할머니가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너시고 있었다.

그냥 지나쳤다.

안동방향으로 직진하려고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데

사이드미러로 보니 길을 건너간

할머니는 다시 예천 읍내 쪽으로

자박걸음 걸이로 걸어가시는데

추우신지 잔뜩 어깨를 움츠리셨다.

신호가 바뀌고 안동 쪽으로

진행하다가 나는 갑자기 차를 돌렸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지 않고 걷고 계신다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할머니도 어주자처럼

건망증이 심하시어 중국집에

보따리를 두고 나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만치 예천 다리 쪽으로

눈을 맞으면서 걸어가시는

할머니를 보고 다시 중국집에

급하게 뛰어 들어가니

주인이 할머니 보따리를 들고

"할매 보따리 찾으로 왔니껴?"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닌 주인이다.

가벼운 할매 보따리를 받아 들고

차를 몰아 할머니 옆에 세우고

차문을 내리고는

"할매요! 보따리 안 잃었닛껴?"

소리쳐도 할매는 이미 귀가 멀어진

분으로 잘 들리지 안으신지

손을 저으면서

"에이고~ 언가이 고마우이더만

지는 비싼 차는 안타니더"

하셨다.

오! 이게 무슨 대답이신가?

서울말만 쓰다가 다시 3-40년

되돌아 온 세월의 대화를 듣는

것이니 나도 금방 이해를 못했지만

할머니 말씀은 자신이 두고 온

보따리를 돌려주려고 온 나를

택시 기사로 알고 비싼 택시는

안탄다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결국 어주자가 차에서 내리고

할매 보따리를 보여주자

그제야

"에고 시상에...

이키로 고마븐 분이 다 있닛껴.

고마우이더 고마우이더. 이기

내 밥부제 맞니더, 맞니더!"

하신다.

"밥부제..."

참 오랜만에 들어 본 소리다.

못살던 시절, 먼 산에 갈 때나

학교 소풍을 갈 때도 이런 보자기에

밥을 싸서 들고 다녔는데

그 당시 밥을 싼다고 하여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천 보자기를

"밥뿌제"

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밥브제"

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침 먹고, 점심 굶고

3-4십리 걸어서 읍내 장을 가거나

밭에서 일하는 분들이 기력이

떨어져서 발음을 여리게

혹은 연음으로 쉽게 하는 탓도 있고

반대로 배부를 때는 강한 된소리로

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기력보존법칙 발음일 것이다.

아무튼 눈발 날리는 도로에서

할매를 부여잡고 여차저차 물어보니

키 작은 할매는 예천에서 막차를 타고

학가산 아래 너리티 마을로

가실 분이셨다.

너리티... 산중에

"넓은(너리) 터(티)"

를 조금 전 설명한

기력보존 법칙으로

"너리티"

라고 발음된다고 보는데

아무튼 예천 너리티는 오지 중

오지 마을이다.

어주자 고향 집은 은모래가 흐르는

내성천 고평 다리를 건너서

우측에 팔현오규의 허백당

어르신의 학당이 있고,

좌측엔 조선 청백리 보백당 어르신

천년 흙집이 있는 직산 고개를

넘어가야하는데 할매가

가야하는 너리티 마실과는

방향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어찌하랴...

눈 내리는 날 추위에 덜덜 떠시는

할머니를 쫌 태워드린들 어디

내일 아침에 태양이 아니 솟을

일도 아니니 내친김에 너리티까지

태워드리고 싶었다.

더욱이 이런 눈발이라면

산골로 가는 막차 버스는

운행을 아니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할매요 타이소.

지도 보문 지나서 너리티로 가니더!"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며...

 

-어주자(魚舟子) 조정래 씀-

 

*저 김참봉은 고향이 예천이고 외가는 호명 금능입니다.. 풍산 소산리는 저의 뿌리이며 선조님들의 고향입니다.   보백당 김계행선생(묘소:호명 직산 피실골)의 후손이고  풍산김씨 공조참판 허백당 김양진(1467-1535)선생은  17대조부이신 안동김씨 12세 평양서윤 김번(1479-1544)선조와는 사돈간이지요.. 경북북부지방 특히 안동방언 특유의 언어로 쓰여진 수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조정래선생님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