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옥리(三玉里)는 영월 읍내에서 동쪽으로 삼옥재를 넘어 끝없이 이어지는 산골짜기 사이로 동강이 그림같이 검푸르게 흐르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이들 세 모자가 이주하는 곳은 모두 다 남의집 사랑방이나 행랑채였다.
함평 이씨는 수없이 이주하는 곳마다 날품팔이와 삵바느질의 일감을 개척해야 했고, 잦은 이주로 그 어려운 삶속에서도 두 아들의 글공부는 계속 이어졌다.
함평 이씨는 새로운 각오로 두 형제를 불러놓고 그들이 쓰던 지필묵과 배우던 책들을 정리해놓고 지금껏 깊숙히 보자기에 꼭꼭 쌓놓았던 서책뭉치를 풀어보였다.
"이미 너희들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마쳤으니 이젠 이 책으로 공부하도록 해라. 이 책들은 모두 귀한 서책들이니 소홀이 보아서는 안되느니라."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연이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책을 한 권 한 권 넘기면서 훑어보았다.
역사적 사실을 개괄적으로 기록한 사기통사(史記通史), 시의 율격을 헤아려 문장으로 서술한 시율부문장(詩律賦文章), 중국춘추전국시대의 여러 학파를 통틀어 제가의 학설을 집대성해 서술한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중국의 시인 이백(李白)을 비롯해 팔대시인의 시문이 기록된 서책들이었다.
병연이는 지금껏 어머니가 깊숙히 숨겨두었던 서책을 보고나서, 더욱이 시문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마음에 드는 좋은 서책이라고 느꼈다.
"어머니. 참 좋은 서책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서책을 어떻게 구입하셨습니까?"
병연이의 물음이었다.
순간 어머니인 함평 이씨는 가슴이 철렁하고 주저앉는 것만 같은 것을 느꼈고, 무어라고 답변을 해줘야 하는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 서책들은 말이야... 이 어미가 대갓 댁들의 일을 해주고 품값으로 받아온 책들이란다."
"네 어머님. 참으로 귀중한 서책들이옵니다. 아마도 이 서책을 가지고 있던 대갓집에서는 높은 벼슬을 하는 집이였나 봅니다."
"물론이지. 그 댁 웃어른은 부사와 방어사를 겸직했고 아드님은 진사라고 하드라."
지난날의 화려했던 사대부의 집안내막을 남의 일처럼 대답해주는 함평 이씨의 입술에서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실은 두 아들에게 내놓은 서책들은 병연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받으면서 읽었던 귀중한 서책들이었다.
그날부터 병연이는 이 서책들을 꺼내놓고 밤 가는 줄 모르고 공부에 몰두했다.
이미 사서오경을 배우면서, 그증 오경에 있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심취돼 있었던 터라 새로 내놓은 서책들은 더할 나위 없이 그의 뜻에 맞아 병연이는 잠시도 서책과 떨어질줄을 몰랐다.
글공부에 열중하던 두 아들의 휴식처는 마당가였다.
마당가 저만치 아래에는 동강이 흐르고 앞뒤로 높게 솟은 산들이 능선의 곡선을 이루며 끝없이 뻗어나간 산맥은 두 형제가 글공부에 지칠 즈음이면 더없는 휴식을 주었다.
어머니는 마당가에 나와 그곳을 바라보는 두 아들이 너무도 대견스러워 다가가 등을 어루만져주며,
"얘들아. 산과 강이 너무도 아름답지? 그게 산과 물의 조화란다. 자연은 사람들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깨닫게도 하고,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 너희들은 이미 사서오경을 배워서 알겠지만, 공자의 논어에 이런 글이 있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곧 어진 자는 산을 좋아했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뚝 솟은 산에서 고요한 도를 취하게 하고, 흘러가는 물은 그 움직임의 도를 취하게 한단다. 너희들도 어떠한 목적을 향해 글공부를 할 테고, 또한 배운 글을 활용할 때면 언제든지 움직일 줄 아는 것을 산과 물은 무언중에 가르침을 주는 거야."
지금까지 잦은 이주로 남한강, 북한강, 평창천, 영월의 동강을 전전하게 된 것도 함평 이씨의 이러한 깊은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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