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여러곳을 전전하며 깊은 산골 이곳까지 이르게 됐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짖고 쫓기는 처지에서 전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우리는 멸족에서 폐족으로 되는 순간 관가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잡으려는 형벌권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미에게 역병(疫病)보다도 더 무섭게 따라다니던 것이 '역적'의 자손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혹시나 그러한 말이 글공부에 심취해있는 너희들에게 들릴까봐 마음졸이며 그때마다 이사를 다녔어야 했다. 만약 너희들이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낙심해 붓을 던져버릴 것만 같아 이 어미의 애타는 심정은 이루 헤아릴수가 없었느니라."
숨겨왔던 말을 털어놓는 함평 이씨의 두 뺨에는 줄곧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어머님의 고통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지금껏 방 안에 편히 앉아 글공부만 했습니다."
"아니다. 병연이도 이 어미의 고통만큼 변변치 못한 지필묵으로 불편을 감수하며 그 많은 글공부에 심취했으니까 오늘 같은 장원의 영광이 오지 않았느냐?"
어머님. 조상을 욕보인 글이 어찌 영광이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할아버님에게 수없이 사죄하고 있사옵니다."
"잘못은 이 어미에게 있느니라. 해서 좀 전에 둥근달님을 쳐다 보며 할아버님께 용서를 빌었느니라."
지금까지 가슴에 쥐고 있던 비밀을 털어버린 듯 함평 이씨는 마음의 평안을 되찿았다.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내 너희들에게 할아버님에 대해 이 말만은 하고 싶구나. 홍경래 군사들이 선천으로 밀어닥칠 때 할아버님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검산성에서 맹렬히 싸우셨느니라. 그러나 할아버지에겐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이는 오늘날 대동법(大同法)으로 인한 나라의 정사(政事) 가운데 삼정(三政 :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모순된 수탈과 탐학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된 원성과, 여기에 서북인에게 정치참여를 배제(排除)한 것에 불만을 품고 폭팔한 곳이 서북인지라 할아버지가 거느린 군사들은 대부분 현지인이어서 거의 모두가 홍경래 편에 투항해 합세했으니 전력이 약해진 할아버지는 홍경래에게 체포되시어 투항하시게 됐다. 훗날 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집안의 어른들이 정치적 부담을 느껴 사건을 가볍게 변론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 할아버지가 술에 대취해 잠을 자다가 홍경래 군사에게 쉽게 체포됐다'고 했다. 이로써 할아버지는 투항한 죄로 처형을 당하셨고, 이태 후 할아버님의 죄는 본인에 한하고 후손에게는 멸족에서 폐족으로 격하돼 겨우 너희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됐단다."
함평 이씨는 말을 끝내고 '푸우'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지금껏 숨겨왔던 집안의 일들을 털어놓았다는 홀가분한 마음에서의 한숨이었다.
"이젠 이 어미의 마음도 가벼워졌구나. 지금까지 역적이니 폐족이니 하는 말이 들릴 때마다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말을 피해 굳이 더한 산골로 숨어들 필요가 없어졌구나."
숨겨왔던 가문의 사연 나누며 만감 교차
사대부의 마님으로 비단으로 걸친 어머니의 그 곱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누덕누덕 기운 삼베적삼을 입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은 더욱 주름살이 늘어 처절하게 보였다.
그래도 갑자기 닥쳐온 어려운 난세에 자식들에게는 폐족이라는 오명(汚名)을 숨기면서 그 험한 일을 해가며 글공부를 가르치느라 삶에 찌든 어머님의 모습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어머님. 이제야 우리 가문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더욱 궁금한게 있습니다."
"궁금한 게 더 있었더냐?"
"네. 지금까지 외가댁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외가댁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친정! 그래 말해주마. 외가댁은 충청도(忠淸道) 결성현(結城縣) 광천리(廣川里)에 있느니라."
함평 이씨는 얼떨결에 '친정'이라 말하고는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친정집에 다녀온 지도 거의 20년이 됐고, 이는 오랜 난세 속에 친정집은 자신만의 가슴속에 묻어둔 채 전전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신을 길러준 어린 시절의 친가, 부모님의 생사조차 모르고 지나온 불행한 날들의 만감(萬感)이 교차되면서 깊은 밤 자신을 태우며 가물거리는 등불을 넋 없이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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