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30편]폐족 이후 아들 병연을 문장가로 키운 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를 재조명하다

김참봉 2010. 11. 16. 12:05


 

 

 

 

함평이씨 족보에 이유수의 사위가 김안근이며, 그 아들이 김병연(김삿갓)임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구나 어머니로서 자식을 잘 키우려는 모성애는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남달리 우뚝 서게 기른 모성이 있다.

굳이 그를 지적하라면 맹자의 어머니, 이율곡의 어머니, 그리고 한석봉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유학의 정통으로 숭앙되며 아성(亞聖)으로 이르게 한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공동묘지 근처에서 저자거리, 그리고 학교 근처로 3번이나 집을 옮겨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일화를 남겼으며, 아들이 공부해야 할 기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자신이 짜던 베를 끊어 아들을 경계해 배움으로 되돌아가게 한 단기지훈(斷機之訓)의 고사는 오늘날까지 현모(賢母)의 교훈이 되고 있다.

또한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이율곡(李栗谷)의 어머니는 시, 글씨, 그림으로 유명한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신사임당은 경서와 시문, 서화에 정통한 여인으로 이율곡이 성장하는 데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전후 9번의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었다.

이후 여러 판서직을 거쳤으며 실천하는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명필가로 이끈 한석봉(韓石峯)의 어머니를 들 수 있다.

양반가의 집안 살림은 기울고, 어린 한석봉은 모래 위나 손가락에 물을 찍어 장독에다 글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를 본 어머니는 신희남 선생의 문하생으로 보내면서 10년 기한으로 성의를 다해 글쓰기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약속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떡 장사를 시작했다.

한석봉이 글씨를 배우러 떠난 지 3년 만에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석봉을 보고 별로 반기지 않았다.

"겨우 3년이 되었는데 벌써 명필이 되었느냐?"

"네. 한성에서 서도경연(書道競演)대회가 있었는데 당당히 장원했습니다."

한석봉은 의기 당당했으나 어머니는 어둡기를 기다려 지필묵을 준비해 아들 앞에 내놓으며 말했다.

"명필가란 어두움 속에서도 마음의 눈으로 쓰면 흔들림이 없느니라. 이제 불을 끌 터이니 너는 글을 쓰고 어미는 떡을 썰 것이다." 하고 말하고는 불을 껐다.

깜깜한 방안에서 한석봉에겐 글을 쓰게 했고 어머니는 떡을 썰었다.

얼마 후 불은 다시 켜지고, 한석봉은 어머니가 가지런히 고르게 썰은 떡과 자신이 쓴 글이 구불구불 엉망진창이 된 것을 보았다.

한석봉은 어머니가 자신의 뒷바라지를 위해 지금껏 떡을 썰어 팔아온 어머님의 (道)에 크게 깨달음을 받고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 훗날 대명필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여기에 또 장한 어머니를 들라 하면 조선후기의 시인으로 다방면의 장르로 수많은 시를 남겨 우리 시 문화에 크나큰 공헌을 남기게 한 김삿갓, 그의 어머니를 추대하고 싶다.

함평 이씨는 하루아침에 폐족으로 몰락한 사대부의 여인으로 날품팔이, 삯바느질 등을 하면서 병연에게 그 많은 학문을 가리켜 백일장에서 장원에 이르게 했고, 후일 그의 독창적인 필치로 수많은 해학과 풍자시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했다.

이토록 아들에게 풍부한 학문을 가르쳐준 그녀가 어떠한 가정에서 성장했는가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함평 이씨의 친정은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광천읍(廣川邑) 광천리(廣川里)에서 이유수(李儒秀)와 원주 변씨(邊氏)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함평 이씨의 아버지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고, 조부는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를 지냈다.

또한 그녀의 외할아버지 변성화(邊聖和)는 목사(牧使)를 지냈고, 그녀의 내,외가는 대대로 이름난 문무관의 사대부 집안이었다.

그리고 김병연의 외갓집은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아흔 아홉칸의 전통 한옥으로 지은 기와집이었다.

이쯤 되면 함평 이씨가 사대부의 가문에서 성장할 때 필히 학문에 능통한 독선생을 모셔와 상주케 해 그에게서 배운 학문과 가정교육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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