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병연'과 '성심'을 흐르는 동강 물에 버려야 된다는 생각이 그이 뇌리를 스쳤다.
이러한 유고(有故)가 친정에서 있었지만 함평 이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폐족의 수모를 받으며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두 아들을 먹여 살리랴 공부시키랴 어려운 난세에서 치다꺼리 하느라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지내왔다.
또한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열녀로서 인정되어 임금이 내려준 명정을 받아 그녀가 자라던 신대마을 어귀에 세워진 열녀각이 세워진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간간히 친정 부모님이 생각날 때면 사대부의 고관 댁이라 잘 지내시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병연이가 할아버지를 몰아세워 장원에 급제하면서부터 해를 거듭했건만 마음이 우울해지며 친정집이 그리웠고, 간간히 꿈속에서도 친정 부모님이 함께 나타나 어렵사리 살아가는 현실을 돌아보며 말없이 돌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병연은 오랜 기간 동안 집안에 칩거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
주로 과체시를 썼다.
그동안 그가 쓴 과체시가 어림잡아도 수십 편은 되리라.
그는 글을 쓰면서 간간히 붓을 든 채 멍하니 앉아 폐족의 자손으로 꽉 막힌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다가 방구석에서 잠을 자다가 잠에서 깨어 우는 두 살 배기 장남인 학균이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학균에게 다가가 토닥이고 있는데 뒷밭에서 옥수수를 심고 들어온 아내가 달려와 학균이를 안고 밖으로 나간다.
병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내는 툇마루에 앉아 학균에게 젖을 물리고, 어머니도 함께 옥수수를 심고 종다래끼와 호미를 들고 들어와 툇마루 한 쪽에 놓고 젖을 빨고 있는 어린 손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힘이 없었다.
병연은 한참동안이나 처절한 몰골의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글을 쓰느라 널려놓은 화선지를 한 쪽으로 모아놓고 새 화선지를 펼쳐 놓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앞에 놓인 붓을 잡고 먹물을 찍더니 화선지에 거침없이 휘갈겨 써내려갔다.
大同難(대동난)
難之難之大同難 난지난지대동난
世上難之大同難 세상난지대동난
我年七歲失父難 아년칠세실부난
吾母靑春寡婦難 오모청춘과부난
어렵다 어렵다 해도 대동법만 하랴
세상일 어렵다 해도 대동법만 하랴
내 나이 일곱 살에 아버지 여의고
우리 어머니 청춘에 과부되는 어려움 있었네.
거침없이 써내려간 그의 손은 떨렸다.
대동난이란 조선 중기에 제정한 세법(稅法)의 하나인 대동법(大同法)의 환란을 말한다.
이 법이 백성들의 과세부담을 경감한다는 구실 아래 제정됐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삼정의 문란과 이에 따른 부정부패가 자행됐고, 공물의 규격이나 수량이 통일되지 않아 지방 관리들이 이를 이용해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더 부과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행을 일삼았다.
여기에 정경유착의 패거리로 등장한 방납업자(防納業者)들까지 생겨나 그들이 관리들과 짜고 공물을 나라에 대신 납부해주고, 추후에 엄청난 이자를 챙기면서 농민 착취에 가세했다.
이에 소작농들은 견디다 못해 농토를 떠나 그중 거지가 되거나 도둑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봉기됐던 난이 발발해 훗날 이를 '홍경래의 난' 또는 농민항쟁(農民抗爭)이라 불려온다.
이 난으로 인해 병연의 할아버지가 연루돼 사대부의 집안이 하루 아침에 폐족이 됐고, 그가 곡산 종복의 집에 피신해 있을 때 7살에 할아버지를 잃게 됐고, 젊은 어머니가 졸지에 청춘과부가 되지 않았던가.
이 시는 비록 병연의 가정에 관한 일이지만, 대동법으로 고통 받고 있는 온 백성들에게도 호소력이 있는 글이기도 했다.
병연은 글을 쓰고 나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
지금껏 써놓은 과체시를 하나하나 훑어 보고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병연'과 '성심'을 흐르는 동강 물에 버려야 된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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