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닭이 우는 소리에 병연은 잠에서 깨었다.
잠에서 깬 그는 미동도 않고 눈을 뜬 채 어둠속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강물소리와 엄마 옆에서 잠자고 있는 학균이의 숨결 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또다시 홰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수닭 울음소리가 어둠의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한시외전(漢詩外傳)에 닭은 문무용인신(文武勇仁信)의 다섯 가지의 덕을 갖추었다고 했다.
굳이 설명을 한다면, 수닭의 붉은 벼슬은 문인의 상징이요[文], 날카로운 발톱은 무인의 위엄이요[武], 싸움에는 용맹스럽고[勇], 모이를 찾으면 다함께 불러서 먹이려는 인자함이요[仁], 때마다 시각을 알리는 것은[信]이라 하는데 이를 닭의 오덕(五德)이라 했다.
병연은 문득 수닭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와 학균이가 잠에서 깰세라 조심스레 일어나 호롱불을 켜고 화선지를 펴놓고 붓을 들었다.
鷄(계)...닭
擅主司晨獨擅雄 천주사신독천웅
緯冠蒼距拔於叢 위관창거발어총
頻驚玉兎旋藏白 빈경옥토선장백
每喚金烏卽放紅 매환금오즉방홍
欲鬪怒瞋瞳閃大 욕투노진동섬대
將鳴奮鼓翅生風 장명분고시생풍
名高五德標於世 명고오덕표어세
逈代桃都響徹空 형대도도향철공
새벽을 주관함은 오직 수닭에게 달렸고
붉은 벼슬 푸른 발톱이 유난히도 빼어나구나.
달을 기울게 해서 흰빛을 감추게 하고
해를 재촉해서 붉은 빛을 펼치게 하네.
싸우려고 성낼 때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목청 뽑고 홰를 치니 날개에서 바람이 이네.
오덕(五德)으로 이름이 높아 세상의 모범되고
먼 옛날 무릉도원에서 울어 하늘의 길을 열었도다.
병연은 닭에 대한 시를 한 수 써놓고 나니 초조했던 마음이 진정되어 갔다.
아마도 자신이 써놓은 시에서처럼 오덕을 지닌 닭의 지혜에서 기약 없는 첫 출타의 용기를 얻었음이리라.
"당신 일찍 떠나세요?"
병연의 등 뒤에서 들리는 아내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당신 벌써 깼구려. 조반 먹고 여유 있게 떠날 참이오."
그는 아내를 돌아다보며 대답했다.
실은 황주 황씨도 첫닭이 울 때 잠에서 깨어 남편이 시 한수를 쓰는 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글을 마치자 잠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건넸다.
병연은 아내가 조반을 지으려 부엌으로 나가고 나서 지필묵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이른 봄이라 바깥 날씨는 찼다.
그는 평소처럼 마당가 강가에 나아가 흐르는 물에 손과 얼굴을 씻었다.
물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세면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 툇마루 벽에 걸린 베로 만든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고 나서, 호롱불이 켜진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벌써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어 머리맡에 포개놓고 앉아 계셨다.
"벌써 기침하셨어요?"
"그래. 오늘은 좀 서둘렀다. 떠날 준비는 다 되었느냐?"
"네. 준비야 뭐 있습니까?"
병연은 더 할 말을 잊고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양 성안을 둘러보며 혹여 뜻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일할 수 있는 자리나 물색해볼까 합니다."
"그래. 한양은 이곳과 다르니까 매사에 서두르지 말고 행동해야 되느니라. 정년 발붙일 곳이 없으면 집으로 내려와 식솔을 거느리고 일거리를 찾도록 해라."
"네. 어머니."
병연은 대답해 놓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조반을 먹고 나니 강 건너 산 능선 위로 해가 떠올랐다.
병연은 두루마기와 갓을 쓰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강녕하십시오."
병연은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툇마루에 놓인 단봇짐을 등에 걸치고, 사립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는 서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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