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35편]한양에 도착한 병연은 시회 장을 찾고 풍월을 읊던 선비들은 병연을 조롱하는데...

김참봉 2010. 11. 16. 12:06

 

 

 

집을 떠난 지 닷새 만에 한강 광나루에 도착해 나룻배를 얻어 타고 뱃머리에 서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는 서울에 거의 다 왔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강가가 가까워오자 강 아래 백사장에서 오색찬란하게 입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두견화가 활짝 핀 봄을 맞아 강가에 나와 시회(詩會)나 열고 있는 사람들이라 짐작 됐다.

나룻배가 강나루를 건너와 강가에 닿자 병연은 같이 타고 온 사람들이 다 내려 언덕 위로 올라갈 때까지 그자리에 선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대로 머물러 서있으려니 배도 고프고 술생각도 간절했다.

그는 강 아래에서 사람들이 모여 술잔이나 들이켜는 곳을 바라보다가 그곳으로 찾아가 점심이나 요기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시회 장에는 화려한 도포자락을 걸친 남자 예닐곱 명이 들러 앉아 시를 쓰다가 술판이 벌어져 기생 서너 명이 술을 따르느라 술병이 오갔고, 한편에서는 집에서 부리는 노비들까지 데리고 와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다.

이 정도면 장안의 사대부집 자제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모두 병연이와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이었다.

병연은 그들 가까이 다가가서,

"시회를 하시는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지나가던 객인데 먼 길을 오느라 몹시 시장하오니 요기나 좀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어디서 왔소?"

그들 중 한사람이 퉁명스럽게 말을 건넨다.

"광주(廣州)에서 왔소이다."

병연이 무의식중에서 광주에서 왔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역시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 벼슬길에 진취해 보려는 그의 계획된 의도였다.

"보다시피 여기는 풍월을 읊는 시회 장이오. 당신은 이곳에 낄 자리가 못 되는데, 저 위쪽 아차산(峨嵯山) 자락에 있는 주막이나 찾아갈 일이지....."

"저도 풍월을 듣는 것은 좋아 합니다만....."

"당신 풍월 좀 배웠는가?"

"웬걸요. 어깨너머로 들었지요."

"배우지는 않고 들었다고?" 그래가지고는 어찌 풍월을 넘본다고 하는가. 내 풍월 한 수 쓸 터이니 들어 보구려."

숫제 반말로 짓거리며 하대(下待)한다.

그는 화선지를 깔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병연은 그가 시 한 수를 써주겠다고 했으나 개의치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생들은 사내들의 틈 사이에 앉아 갖은 추파를 던져가며 술을 따라 권하느라 여념이 없고, 한쪽에서는 여인들이 음식장만 하느라 값진 고기 덩어리가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가하면, 솥뚜껑을 걸어 놓고 전을 지지고, 고기를 굽느라고 지글거리는 구수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이로서 허기진 병연의 뱃속에서는 더욱 시장기를 재촉해 왔다.

시객들의 뒷전에서 겨우 돗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서 군침만 삼키고 있는 병연의 앞에 풍월 한 수 써 보이겠다던 자가 글이 적힌 화선지를 내려놓는다.

 

石上難生草  석상난생초

房中不起雲  방중불기운

山間是何鳥  산간시하조

飛入鳳凰群  비입봉황군

 

돌 위에 풀 나기 어렵고

방 안에 구름이 일지 않는다.

산간에서 이 무슨 잡새가

봉황들이 노니는 곳에 날아들었느냐.

 

그가 쓴 글은 남루하게 차린 김병연의 입성을 보고 조롱하는 글이었다.

그러고도 설명까지 하지 않는가.

"돌 위에 풀 나기 어렵고,"

병연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풀이는 내가 하겠소이나."

병연의 단호한 말에 둘러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일행들이 조용해지며 병연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병연은 그가 써준 글을 들여다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종이는 희고 깨끗한데, 글은 깨끗하지 아니합니다."

그가 쓴 글에 대한 병연의 풀이가 걸작이었다.

병연의 엉뚱한 글 풀이에 일행들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있었고, 술을 따르던 기생들도 술병을 든 채 병연의 위엄있는 말에 숨을 죽였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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