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이 글을 써준 사람을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을 한다.
"선생! 선생이 이 글을 쓰셨던 붓을 잠시만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좀 전에 글을 써준 자가 병연의 말에 의아한 듯 조심스럽게 붓을 집어 병연의 앞에 내밀자, 병연은 차분히 붓을 잡아 먹물을 듬뿍 찍고는,
"나도 선생처럼 오언절구(五言絶句)로 한 수 써 보이겠소이다."라고 말하며 그가 써 놓은 글 밑에 서슴없이 휘갈겨 써내려갔다.
我本天上鳥 아본천상조
常留五綵雲 상유오채운
今宵風雨惡 금소풍우악
誤落野鳥群 오락야조군
나는 본래 하늘 위의 새로서
항상 오색구름 속에서 살았노라.
오늘 밤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처서
잘못해 들새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일필휘지(一筆揮之)였다.
과히 그의 필체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따를 자가 없었다.
순간적인 시상으로 거침없이 휘둘러 쓰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연은 쓴 글을 두 손으로 들고 아까 조롱의 글을 써서 병연에게 건넸던 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병연의 글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 펼쳐 놓았다.
병연의 글을 훑어 본 일행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을 벌려 탄성을 울렸다.
"아니! 이토록 훌륭한 글을....."
일행 중 좌상인 듯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마련하고 병연을 보고 말을 건넨다.
"선생. 이쪽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합석합시다. 보아하니 연배도 비슷하고, 현재 우리도 학문을 배우고 있는 중이오니 사양 마시고 이리로 와서 앉으시오."
그의 진솔한 마음을 알고 병연은 서슴없이 일어나 그가 만들어 준 그의 옆 좌석에 가서 앉았다.
"선생의 글은 실로 금낭가구(錦囊佳句)였소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가 쓴 글도 여시객힐거(與詩客詰거)을 했으니 결례가 있었소이다."
"아니오. 결례는 이쪽에서 먼저 했습니다. 자 모처럼 훌륭하신 시객을 만났으니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여기서 몇 살 더 먹었다고 형으로 우대받고 있는 복경 안응수라고 합니다."
안응수의 통성명을 받은 병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는... 김 란 입니다."
병연은 난생 처음 본명인 '김병연'을 버리고 변성명인 '김 란'으로 불러 주었다.
"자호는 어떻게 되십니까?"
"네. 자는 이명(而鳴)이고, 호는 지상(芷裳)이라고 부릅니다."
병연은 며칠 전에 지은 가명과 자호를 서슴없이 불러 대었다.
변성명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으나 살아가기 위해선 불가피함이 아닌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통성명은 이러했다.
안응수를 비롯해 신석우, 신석희, 정현덕 등으로 통성명이 이어졌다.
또한 통성명이 끝나자,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이 병연의 앞으로 놓아졌다.
밥상과 함께 기생 하나가 병연의 옆에 와서 정중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술을 따라 권하며 한마디 속삭인다.
"선비님. 글이 훌륭했습니다."
"고맙소."
기생의 눈에는 병연의 허름한 차림새가 시골뜨기로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니까 빛나는 눈동자에 호남형의 미남이었다.
병연은 기생의 속삭임에 빙그레 웃고는 그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들고 둘러앉은 대중을 향해, "같이 드시지요?"라고 권했다.
"아니오. 드십시오. 우리들은 식사도 끝났고, 술도 몇 순배 돌았습니다."
옆에 앉은 신석우가 말을 하자, 병연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쌀로 담근 술에다 인삼을 넣었는지 술맛도 일품이었다.
그는 기생이 따라주는 술을 또 한잔 비우고 나서 수저를 들고 맛있는 쇠고기 국에 하얀 쌀밥을 듬뿍 떠서 국에 말아서 먹기 시작했다.
흰 쌀밥에 고기 국을 입에 떠 넣으니 불현듯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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