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보백선생의 맏사위 행정공 박눌(朴訥)

김참봉 2019. 7. 25. 19:22

*박눌(朴訥,1448~152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우(如愚) 호는 행정(杏亭) 본관은 함양이다. 증조부는 공조판서 대제학 박규(朴規)이며 조부는 울진현령 증좌통례(贈左通禮) 박이경(朴而敬)이다. 1448(세종 30) 성주군 선남면 오도종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아버지 사직(司直)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박소종(朴紹宗)이 상주 함창(이안)으로 이거할 때 함께 갔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깊고 성품이 온화하며 의지가 굳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고 창락도 찰방(昌樂道 察訪)을 지냈는데, 창락도(昌樂道)는 오늘날 풍기 일대에 있었던 역원(驛院)으로 순흥·영주·봉화·예천·안동·예안의 간이역을 거느린 경상도 북부지역의 큰 역이다. 찰방(6)은 곧 역장을 말한다. 자식들의 현달로 사후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상주 청암서원과 예천 금당실 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공의 아들을 위한 교육방식은 좀 독특했는데 원두막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 못 내려오고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과 노력으로 맏아들 거린(巨鱗)1504(연산 10)에 급제해 금산군수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둘째 형린(亨鱗)1516(중종 11)에 급제해 충주목사 이조참의, 셋째 홍린(洪鱗)1522(중종 17)에 급제해 도승지 대사헌 예조참판을 지내고 넷째 붕린(鵬鱗)1533(종종 28)에 급제해 한림 시강원설서, 다섯째 종린(從鱗)1532(중종 27)에 급제해 교리 이조정랑을 지내 5형제(향오린,鄕五鱗) 모두를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시켰다. 향오린(鄕五鱗, 巨鱗, 亨鱗, 洪鱗, 鵬鱗, 從鱗)중 막내 종린(1496~1553)은 이조정랑으로 있을때 중종(中宗)의 외척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고 나서 횡포가 심해지자 1538년 벼슬을 그만두고 처의 고향인 예천 용문면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의 한 곳인 금당실에 자리 잡아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문집이나 유고를 남긴 사람만 하여도 40~50명이 된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한성판윤,예조,병조,형조,공조판서 등을 지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은 세상에 아들 다섯 낳기도 어렵고-세지생오자난(世之生五子難), 다섯 아들이 급제하기도 어렵고-오자등과난(五子登科難),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어렵다-오자구문난(五子俱文難) 삼난가(三難家), 즉 하기 어려운 일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한 집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보백선생(寶白先生)의 맏사위 행정공(杏亭公) 박눌(朴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인 정부인(貞夫人) 김씨의 역할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김씨는 바로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물이 없으나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물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안동인 보백당 김계행(金係行,1431~1517)의 세딸 중 첫째딸이다. 선생의 둘째딸은 풍산인 유자온(柳子溫,1453~1502)에게 시집갔는데, 예조참의 승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입암 류중영(柳仲郢,1515~1573)의 할머니이고, 풍기군수 원주목사 겸암 유운룡(柳雲龍)과 영의정 풍원부원군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증조할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