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1대방조..18세 고성공(諱성달)할아버지

김참봉 2020. 8. 1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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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문학관] 홍성 출신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안동세고(安東世稿)』 By 한국문학관협회

홍성 출신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안동세고(安東世稿)』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는, 조선 후기 부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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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수(高城郡守) 김성달(金盛達,1642~1696) 묘갈명

공은 휘는 성달(盛達), 자는 백겸(伯兼),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고려의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이 그 시조이다. 고조 휘 극효(克孝)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상용(尙容)은 우의정으로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호는 선원(仙源)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부 휘 광현(光炫)은 이조참판을 지냈다. 부친 휘 수민(壽民)은 덕산현감을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효성으로 정려를 하사받았다. 모친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목사(牧使) 휘 형각(衡覺)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임오년(1642, 인조20) 1월 20일에 태어났다. 아이 때부터 천성이 인후(仁厚)하였는데 성장해서는 마음이 너그럽고 선을 좋아하여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다분하니, 당시의 선배와 친척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갑인년(1674, 숙종1)에 처음 벼슬하여 효경전 참봉(孝敬殿參奉), 사도시 봉사(司䆃寺奉事), 도원도 찰방(桃源道察訪),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진안 현감(鎭安縣監)에 제수되었다. 군은 한결같이 성신(誠信)과 인서(仁恕)로 백성을 대하고 정사를 행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것처럼 관직에 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하였고 이해를 따진 적이 없었다. 또 와서 별제(瓦署別提),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고성 군수(高城郡守)가 되었다. 영동(嶺東)에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공이 성심을 다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니 유망(流亡)하는 백성이 없었다. 그해(1696년) 8월7일에 관사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백성들이 달려와 호곡(號哭)하여 상여를 전송하였다. 10월에 양주(楊州)의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옥재 1643 ~1690)이니, 정자(正字) 홍상(弘相)이 그 부친이다. 부인은 혜신(惠愼)하고 유정(幽貞)하여 옛적 열녀의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6년 먼저 졸하였다. 처음에 홍주(洪州)에 안장하였다가 임오년(1702)에 공의 묘소 왼쪽으로 옮겨 부장하였다.
공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시택(時澤)은 비안현감이고, 다음은 시윤(時潤)ㆍ시제(時濟)ㆍ시흡(時洽)ㆍ시정(時淨)이며, 급제(及第) 이명세(李命世), 종실(宗室) 밀성군(密城君) 이식(李栻), 이항수(李恒壽), 송요화(宋堯和)는 그 사위이다. 측실에게서 1남 3녀를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공은 가정에서는 효우(孝友)를 행하였고,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적에는 기쁜 안색으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형제와 화락하게 서로 잘 지냈으며, 자손을 자애로 어루만지되 능히 잘 가르쳤고, 노복을 대할 적에 인자하되 법도가 있었다. 청렴결백하게 벼슬살이하였고, 허심탄회하게 남을 대하였으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가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항상 태연하여 근심스러워하는 안색이 없었다. 사람됨이 진실하여 거짓으로 꾸민 적이 없었고 염담(恬淡)하여 물욕이 적었으며, 세상의 명리에 대해서는 더욱 마음을 두지 않았다. 평생 기쁨과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비방과 명예를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마음이 평탄하고 진솔하여 편견이 없다.” 하니, 동배들이 이로써 공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시를 읊기를 몹시 좋아하여 거의 버릇이 되었는데 당시 문장의 대가들이 모두 탄복하여 왕왕 붓을 놓고 한 걸음을 양보하였다. 공은 또 산수를 좋아하여 더불어 승경지에 대해 말할 적에는 혹 침식을 잊기도 하였다. 거처하는 곳에 해산(海山)의 승경이 많았는데, 매양 가절(佳節)이 되면 형제와 아이들 그리고 갓을 쓴 사람들과 그 가운데에서 소요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 〈오산곡(鰲山曲)〉을 짓고 동군(東郡 고성(高城))에 있을 때에 〈봉래곡(蓬萊曲)〉을 지어 뜻을 드러내었고, 심지어 초연히 세상 사이의 표방(標榜) 밖으로 홀로 벗어나 매양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의(時議)가 분분하여 다툼이 막 일어나려 할 적에 홀로 베개를 당겨 설핏 잠에 빠져 듣지 않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의 자품이 남보다 월등히 세속을 벗어난 것이다. 시고(詩稿)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공과 척의(戚誼)가 있으니, 공의 아들 시제(時濟)가 조카사위인데, 이 역시 청고(淸高)하여 지조가 있다. 지금 형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공의 묘갈명을 청하기에 늙고 병들어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군의 선대는 / 嗟君家世
태산북두 같았고 / 如斗如山
아 군의 바탕은 / 嗟君性質
난옥 같았어라 / 如玉如蘭
강호는 거처였고 / 江湖家計
풍월은 벗이었으며 / 風月襟契
또 아름다운 배필 있어 / 亦有嘉耦
금슬로 친애하였도다/ 琴瑟其友
복록이 많을 필요 있겠는가마는 / 祿豈必多
수명이 길지 못함이 애석하구나 / 惜年不遐
아들과 손자들이 / 有子有孫
효성스럽고 재주 있으니 / 而孝而才
아직 남은 경사 있음을 / 尙有餘慶
장래에 징험할 수 있으리라 / 可徵方來

*묘갈명 작성자: 대사헌 우의정 판돈녕부사 파평인 명재 윤증(尹拯,1629~1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