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중가요의 골목길-강원 춘천(인간축음기 음색마녀 신미래)

김참봉 2021. 4. 18. 08:44

대중가요의 골목길(25)-강원 춘천

나른한 안개로 감싼 봄내, 호반의 춘천

춘천이라는 이름을 부르면 봄이 나른하게 다가온다. 겨우내 얼었던 물이 풀리고 안개가 일상처럼 뒤덮여 오면 산과 물에 싸인 춘천은 봄내(春川)다워 진다. 물을 끼고 있는 고을 가운데 평양 다음으로 살만한 곳이 춘천이라 했던가. 춘천은 오래도록 비탈 많은 강원도의 수도다. 열여덟 소양강 처녀가 지는 해에 그리워한, 남쪽 마을로 간 연인, 봄내의 가을 여인 김추자가 견딜 수 없는 몸을 흔들며 노래 부른 먼 곳의 님도 북한강을 따라 춘천을 떠나갔을 터이다. 통기타를 들고 기차를 타던 젊음은 이제 iTX 청춘열차 2층 칸으로 가볍게 춘천행에 오른다. 예술과 문화의 향기가 머물던 춘천의 명동은 닭갈비 굽는 냄새가 그득하다

 

아껴두었던 춘천으로 가는 길이다. 날이 좀 좋다 싶으면 춘천으로 가는 길은 여지없이 막힌다. 춘천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풀어진다. 딱히 거기 가서 할 일이 없어도 그냥 갈 수 있는 길, 서울에서 이백리 길이다.
내 젊은 날에서 춘천은 빈칸이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추억을 재생할 그 무엇이 없다. 친구들은 춘천 이야기를 그토록 신나게, 아니면 혹독하게 기억하는 데 지금 노래를 찾아 떠나는 길에 춘천에 대한 나의 공백은 지직거리다 끊어지고 마는 흑백 영화필름이다. 그러기에 여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춘천 토박이의 정겨운 회고이거나 내 친구들의 생생한 무용담에서 빌려와 앉힌 것이다.

안 오시면 어쩌나, 열여덟 애타는 아가씨 속내,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
아무래도 춘천의 대중가요 가운데 대표주자는 <소양강 처녀>다. 춘천역에 내려 북쪽으로 향하면 이내 만나는 ‘소양강 처녀상’은 춘천의 대표적 조형물이 된 지 오래다. <소양강 처녀>도 1960~70년대에 거세게 불었던 ‘아가씨’ ‘처녀’ 노래 열풍의 산물이다. 가수 이신행이 본명인 작곡가 이호가 곡을 쓴 이 노래는 원래 <춘천 처녀>라고 제목을 정했다가 어감 때문에 <소양강 처녀>로 바꾸었다.
무서운 아버지의 회초리도 열여덟 피어오르는 꽃 가슴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 자리에서 애태우며 돈 벌러 간 사나이의 맹세만을 기다리는 심정의 노래는 애처롭고도 사랑스럽다. 전국에 아가씨, 처녀 항렬의 노래를 239개까지 헤아리다 포기한 것은 그 질기고 모진 사랑의 힘이 뿌리 깊다는 것을 말해 준다.
< 소양강 처녀>는 당시 10만 장의 빅히트를 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노래방 순위의 수위를 차지하는 애주가의 애창곡이자 국민가요다. 1992년 한서경이 랩댄스 스타일로 리메이크해 원곡은 원곡대로, 리모델링 판은 또 그대로 사랑을 받았다.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트로트, 조선족 동포 애창곡 1위니 이런 히트도 없다. <소양강 처녀>는 춘천의 자랑이다.
작사가 반야월이 춘천에 준 선물치고는 크다. 아무도 반야월의 친일 노래 이력을 여기다 끌어 붙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으뜸 국민애창곡인 <울고 넘는 박달재>의 처지와는 사뭇 다르다. 친일 청산의 목소리에 눌려 스피커의 볼륨을 줄이고, 성사 직전의 가요박물관 계획마저 포기해버린 제천시와는 사뭇 다르다.
2005년 춘천시는 5억5천만 원을 들여 소양강 처녀상을 만들어 관광 상품화하며 아예 춘천의 랜드마크처럼 만들었다. 하던 김에 ‘누가 소양강 처녀의 실존 모델인가’를 찾는 작업에까지 나섰다. 두 중년 여인이 나왔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1953년생 가수 지망생 윤기순 처녀는 상경하여 공교롭게도 ‘가요작가동지회’ 사무실 직원으로 근무했고, 윤기순의 아버지가 반야월, 월견초, 고명기, 김종환 등 가요작가들을 초대해서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한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가수 생활을 하다 36년 만에 귀향해 지금 춘천에서 음식점을 하며 살고 있다. 당시 춘천여고 3학년이던 1950년생 박경희 처녀는 소양호에서 배터를 운영하던 집 딸이라, 한 달여 머물던 반야월 선생을 나룻배에 태우고 갈대숲이 밀밀한 고산 섬까지 갔던 추억이 있다. 그때 반야월 선생이 “곡을 만들고 있는데 네가 모델인 노래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춘천시와 지역방송까지 나선 실존 인물 찾기는 무승부. 두 여인을 모두 ‘소양강 처녀’로 공인하기에 이른다. 반야월이 생전에 “이 노래는 어느 특정인을 말한다기보다 소양강 강가에 사는 모든 처녀의 이야기다.”라고 했다는 증언에 근거했다.
가사 속에서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에서 어떤 이가 “붉은 동백꽃이 피는 북방한계선에 춘천은 벗어나 있다”고 꼬집자, 김유정의 ‘봄봄’에 등장하는 노란 동백꽃까지 동원하며 “이것은 노란 꽃이 산수유처럼 피는 생강나무꽃을 말한다”는 해석을 내놓기까지 했다.
하여간 작곡가 박시춘의 먼 친척 조카가 되는 김태희는 이 노래 한 곡으로 스타가 되었으나 이렇다 할 후속곡은 만들지 못했다.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김태희의 목소리도 고희를 넘어서일까, 고음을 등반하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소양강 처녀> 반야월 작사, 이 호 작곡, 김태희 노래

 

엘레지의 여왕이 부른 숱한 노래, 북한강에도 이미자의 <춘천댁 사공>
< 소양강 처녀>가 춘천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춘천댁 사공>이란 노래가 있었다. 1967년 의암호가 1차 완공되며 담수를 시작하자 호반도시 춘천을 홍보하기 위해 원병의 춘천시장은 노랫말을 공모한다. 이때 조선일보 춘천주재 기자로 있던 배동욱 씨가 자신의 생일을 딴 사공구(409)란 예명으로 응모해 당선되었다.
노랫 속 춘천댁 사공은 실존인물이다. 춘천 신북에서 서면 서상리 배터 마을로 시집온 이승자 여사 이야기다. 일제 때 남편은 딸 하나를 낳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뱃사공으로 외동딸을 키우며 남편을 기다린 그 사연에 모티브를 얻었다는 가요다. 아마도 오늘날 소양강 배터 근처에 생겨난 춘천 번개시장으로 서면에서 재배한 채소와 곡식을 실어와 자식들을 공부시켜 전국 제1의 ‘박사마을’로 키워낸 억척같은 교육열 또한 춘천댁 사공이 실어 나른 뱃길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전국적으로 제법 인기를 끌었던 이 노래에 재미를 본 원 시장은 나중에 수원시장으로 부임해서도 전국 공모를 거쳐 <수원 처녀>란 노래를 만들었다. 둘 다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이니 자매간인 관제(官製) 가요다.

 

실안개 소리 없이 풀리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놓고 미련을 싣고
춘천댁 사공이 꽃 각시 사공이
한사코 오마던 그 임을 기다리네
떠나간 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춘천댁 사공

흰 구름 정처 없이 떠도는 호수 위에
꽃잎을 뿌려 놓고 사연을 싣고
춘천댁 사공이 꽃 각시 사공이
사십리 물길에 추억을 새겨보네
떠나간 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춘천댁 사공
<춘천댁 사공> 배동욱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1969, 지구레코드

 

두 명의 아나운서가 부른 호반의 엘레지, 이정민과 이규항의 <춘천호의 밤>
1967년 의암댐이 건설되면서 춘천은 의암호에 둘러싸인 거대한 호반의 도시가 된다.
옛사람들이 기억하는 노래 <춘천호의 밤>은 각별하다. 아나운서 출신의 1호 가수 이정민이 불러서다. 그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던 그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 이규환 아나운서다.
그는 1966년 <먼 산울림>으로 첫 취입하고, 영화 주제가 <남매> <어느 여인에게> 등을 남겼다. 정부 홍보물과 육·해·공군 소개 영상에 어김없이 등장했고, 1964년 입대와 동시에 국군 방송에 투입되어 ‘희망의 구름다리’ ‘위문열차’ 같은 공개방송을 진행했다. 또한 각 군부대를 순례하는 ‘마이크 탐방’까지 제작했으니 아나운서, 가수, 성우, 음악진행자 등 1인 4역을 했다.
< 춘천호의 밤>은 미주방송인 협회장을 역임한 부군 이병태와 춘천의 부부시인으로 유명했던 유정희가 작사했고, 이철혁이 작곡했다. 공영방송의 아나운서라는 신분이란 조심스러운 행보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였지만 그 정직한 미성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곡가 이철혁은 <네잎 클로버>로 유명한 이규항 아나운서에게 다시 취입하게 한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서정적 분위기는 넘친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춘천호는 아무래도 오늘날 화천을 가다가 만나는 춘천댐이 만든 춘천호가 아니라 의암호일 것이다. 소양강 언저리와 이어지는 호수인데다 지금도 어두운 춘천호에는 혼자 거닐 수 있는 호반길이 없으니 말이다.

 

안개 짙은 호반을 나 혼자 거닐면
흘러간 그 옛날이 다시금 그리워
소리 없이 마음을 흔들어 주네
이 밤을 혼만이 보내야 합니까
낙조 따라 맴도는 그리움 한없이
춘천호 밤과 함께 내 곁을 떠납니다

소양강변 길 따라 속삭인 사연
지금은 눈과 같이 사라졌어도
그림자 다가와 알아줍니다
못 잊는 아쉬움에 울어야 합니까
맵지 않은 물결에 추억은 한없이
춘천호 밤과 함께 내 곁을 떠납니다
<춘천호의 밤> 유경희 작사, 이철혁 작곡, 이정민 노래, 1966, 오아시스 레코드

 

파격의 쏘울 음악, 이 봄내에서 키우다,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
이제 춘천이 낳은 두 사람의 걸출한 가수의 모교 춘천여고를 찾아간다. 지금은 이사하고 없는 춘천여고 자리를 찾아간다. 근화초등학교 못 미쳐서 언덕길을 오른다. 봉의산 아래 기와집골을 내려다보고 살던 사람들이 물지게로 물 날라다 먹고 빨래는 소양강 강가까지 가야 하는 길, 거기를 ‘모수물재’라 했다. 춘천의 기와집골은 도시재생사업에서도 빠져나와 26층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겨울연가’ 속 한 무대 ‘준상의 집’도 이제 아카이브로나 볼 일이다.
춘천여고 자리는 춘천시 산하기관들의 통합청사가 되어 어수선하다. 1960년에도 고목이던 목백합 나무만이 여전할 뿐 그 정취는 옛 춘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있다. 이 학교에 1970년대를 휩쓴 가수 김추자의 여고시절이 있다. 다섯 자매의 딸 부잣집, 교육자 집안에서 육감적인 김추자의 사이키델릭 록 음악의 씨앗이 자랐다는 것도 이례적이다. 여고시절에 ‘춘천 향토제’에서 수심가를 불러 입상할 때 배뱅이굿의 이은관 명인이 칭찬했다니 그 음악적 끼를 어찌 주체할 수 있었겠는가. 춘천의 빡빡머리 남고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는 전언이 사실일 것이다.
미대 진학에 실패한 그녀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며 대학 신입생 노래자랑에서 1위 입상을 하고 전설의 작곡가 신중현의 문하가 된다. 쏘울과 판소리 창법이 어우러진 <늦기 전에>로 데뷔하며 싸이키 창법의 <님은 먼 곳에>(1970), <거짓말이야>(1971)을 잇달아 내놓으며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찬사를 듣는다. 1972년에 대학 신입생이 된 내가 김추자를 본 것은 동국대 중강당에서 열린 ‘신입생환영 노래자랑’에서다. 연영과 3학년생 이덕화의 사회로 진행된 무대의 피날레를 역시 3학년생 김추자가 마무리했다. 열광의 도가니였다. 김추자식 제대로 흔드는 노래는 이금희의 볼륨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역시 신중현의 문하에서 한참 빛을 발하다 사라진 가수 김정미가 신입생으로 선을 보이기도 했다.
김추자는 그의 시끄러운(?) 노래만큼이나 ‘선데이서울’에 화제를 몰아다 주었다. 부산의 배호 쇼에서 피날레를 놓고 김세레나와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거나 방송사 스케줄을 펑크내기도 했다. 더구나 매니저에 의한 소주병 테러 4일만에 붕대를 칭칭 감고 컴백쇼 무대에 나와 세간을 놀라게 했다. <거짓말이야>의 하늘을 찌르는 손짓이 간첩과의 교신신호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고, 1971년엔 가요계의 비리를 폭로하며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가수 배성이 은퇴 후 영영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1년 방송활동정지 후 다시 <무인도>(1974)가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1975년 가요계의 대지진 ‘대마초사건’으로 사라진 지 33년 만인 2014년 로 무대로 회귀를 꿈꾸었으나 그 시절의 영화를 복원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가 버렸다. 유행가의 숙명일까. 그렇게 ‘1970년대의 이효리’ 김추자는 신중현이 추구하던 한국적 록을 구현한 한 시대의 가수임을 확인한 채 가라앉았다. 원래 패티 김에게 주려던 노래 <님은 먼 곳에>가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야말로 행운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영원히 먼 곳에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님은 먼 곳에> 유호 작사, 신중현 작곡, 김추자 노래, 1970, 유니버설레코드

 

군인 아버지의 궤적으로 춘천 출신이 된 노사연의 <님 그림자>
또 한 사람 춘천여고가 배출한 걸출한 가수는 <님 그림자>의 노사연이다. 그녀는 특무대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임지 화천에 세 살 때 들어와 자랐으나 춘천여고로 진학했다. 춘천여고는 춘천시청 건너편 명동으로 바로 이어져 있다. 음악다방이 여러 개 있었고, 패션, 문화의 중심지 이자 춘천 주둔 미군클럽 문화의 영향도 직접 받은 명동이었다. 미군과 국제결혼 해 미국으로 건너간 가정도 있었고, 남겨진 혼혈아들이 함께 공부하기도 했으니 춘천은 산골짜기 합수머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양풍(洋風)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였다.
노사연의 모계로 흐르는 노래의 피는 그녀가 묵직한 음색으로 음악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다.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에서 <돌고 돌아가는 길>로 금상을 탔으니 우수한 등용문 통과였다. <님 그림자>에 이어 탈북자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만남>, <이 마음 다시 여기에>, <여자>, <사랑>에 이어 2014년 발표된 <바램>은 공전의 히트를 하며 유튜브 조회 1200만 회를 돌파하기도 했다. 솔직함과 허당의 매력을 골고루 갖춰 타고난 노사연의 입담은 예능에서도 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춘천여고 출신의 두 가수는 ‘님’을 노래한 대표곡을 가지고 있다.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서의 님은 아무래도 야속한 님에 속한다. 눈물 주고 꿈도 주었으니 알만한데도 모르는 채 가버린 님이다. 노사연의 <님 그림자> 속 님은 훨씬 짝사랑에 가까운 연모다. 슬로우 트로트의 건조하지 않은 슬픔이다. 푸른 달빛이 만든 그림자의 색깔 또한 블루문의 애조 그대로다. 확장해 보면 김수희의 <애모>에 담긴 님이나 마찬가지 결이다. 짧은 노랫말 곳곳에 배치된 ‘헤듯’ ‘휘헝한’ 같은 시적 허용 속에서, 앞에 설 수 없는 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의 푸른 기운이 감돈다. 원곡이라 할 수 있는 코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가 1961년 발표한 <케어리스 러브(Careless Love)>의 리듬보다 훨씬 부드럽고 나직할뿐더러 연모의 극한에 이르는 서정적 가사가 마음을 더욱 부여잡는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일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헝한 달빛 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2절 반복)
<님 그림자> 김욱 작사·작곡, 노사연 노래, 1983, (주)예음사

 

청춘의 낭만 그 여백 춘천행,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예나 제나 청춘은 방황과 불안의 시기를 거친다. 이때 현실을 탈출이나 할 것처럼 오를 수 있는 기차는 경춘선이 가장 만만하다. 두 시간 채 못 걸리면 종점에 닿고,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술 한잔 독작(獨酌)하고 다시 막차를 타지 않아도 스모그 자욱한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춘천이야말로 갑갑함의 해방구인지도 모른다. 대학생의 낭만은 뒤집어 보면 바로 청춘의 고뇌 그 자체다. 그 옛날 경춘선 열차의 매력은 산협을 맴돌아 가면서도 대성리부터는 북한강 줄기를 따라 오가기에 푸른 강물과 산그늘을 이고 지고 갈 수 있어 좋다. 그 시간만큼은 잊어버릴 수 있어 편안하다. 어차피 교외선 장흥이나 송추에서 간략한 행사를 할 바가 아니라면 경춘선 간이역에 내려 하룻밤 캠프파이어 앞에서 보내는 MT가 제격이다.
청춘들이 어쩌다 경춘선을 타게 되는 건 두 부류다. 바로 통기타를 들고 하룻밤 먹거리를 챙겨 떠나는, 그나마 향토장학금을 받아서 근근이 우골탑을 쌓고 있는, 혜택 받은 대학생이거나 논산훈련소를 떠나 막막한 강원도 동부전선으로 가기 위해 군용열차를 타고서도 다가올 부대 배치의 불안으로 눈을 감고도 졸지 못하는 작대기 하나뿐이다. 최백호의 <입영전야>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같은 노래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의 이야기다.
대한민국 국군 신규 충원 병력의 60%가 거쳐 간다는 ‘103 보충대’, 군용열차가 춘천역에 도착하면 신병들의 불안은 극에 달한다. 샘밭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M60 트럭의 적재함에 옮겨 타고 흔들리며 소양강을 건넌다. 3~4일간의 대기 후에 받아든 배치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다’는 막 보병의 멀건 표정뿐이다. ‘빽 없는 그대’들의 절망을 싣고 동부전선행 트럭은 한껏 먼지를 날리며 배후령 고갯길로 사라진다.
그런 순둥이 신병만 오는 것이 아니다. 십수 년을 군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마저 군생활을 때우기 위한 불량 병사, 소위 ‘감자’들이 이송되어 오는 날이면 춘천역 근처는 비상이다. 그들은 이미 누구 말도 잘 듣지 않는다. 계급장 사칭은 물론 어떤 놈은 별까지 그려 붙이고 오기도 했단다. 남한산성 교도소 바깥 공기가 얼마나 좋았으면 내리자마자 근화동 서부시장 근처에 늘어선 홍등가 ‘난초촌’으로 직행했을까. 헌병들이 출동해 방방을 일일이 문을 두드려 달래서 103 보충대로 갔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도 있다. 미군이 주둔하던 캠프 페이지 터는 뒤늦게나마 문화유적 발굴 작업으로 담장이 둘러쳐 있고, 유곽의 누나들이 남 중학생들이 지나가면 쪼코렛또를 건네주며 “공부 잘하라”고 말을 건네던 사창고개는 낮아졌다.
노래로 돌아가자. 벼락처럼 1989년에 등장했던 신예 김현철도 벌써 31년 차 싱어송 라이터가 되어 중년이 된 지 오래다. 고3 때 작곡을 시작한 천재성, 시티팝의 장인은 오래도록 후배들이 자신의 작품을 뒤집는 반복적 리메이크에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깊어진 감성, 시대를 앞서간 발라드 음악 속에서 나직이 읊조리듯 김현철이 노래했던 옛사랑과 청춘의 고뇌는 여전하다. 어쩌면 대물림되어 개개의 공간으로 함몰된 젊은 자아를 괴롭히는 붕어빵 명제다.

 

조금은 지쳐 있었나 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 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차창 가득 뽀얗게 서린 입김을 닦아내 보니
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 한잔 마시고 싶어
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
우~~우우우우~~~~
<춘천 가는 기차> 김현철 작사·작곡, 김현철 노래, 1989, 뮤직앤뉴

 

살고 싶은 강촌은 여기가 아니다,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
춘천MBC가 있는 수변을 지나 의암호반 길을 따라 내려오면 이내 강촌이다. 경춘선을 타고 산협으로 깎아낸 철길로 가던 춘천행 기차는 이제 없다. 가평을 벗어나 강을 건넌 기차는 백양리역을 지나서는 긴 터널 속으로 접어든다. 2010년 경춘선 전철화가 이루어지면서 강촌역도 골짜기 안으로 물러앉고 팔미천 변으로 돌던 옛 철길도 신남역을 김유정역으로 이름을 바꾸어 북한강과는 결별한 채 속도를 낸다.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가 그냥 보통명사 강촌인 줄 알았는데 실존하는 지명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68년 김성휘 시인은 춘천에서 서울로 나가다가 강촌에서 나룻배로 북한강을 건너 둔더리 배터에 다다른다. 식당과 여인숙을 겸한 춘강옥(春江屋)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지낸다. ‘해가 지면 뻐꾹새 우는’ 풍경이 2절의 시작인 저녁이요,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나르는’ 풍경이 1절의 아침이다. 강촌 문화마당과 지역주민들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쓴 시인의 시를 직접 육성으로 확인했다. 노래비가 강촌역 가까이 서 있다. 나훈아의 청재킷과 괭이를 어깨에 멘 음반 표지는 어울리지는 않았어도 고향과 농촌회귀를 꿈꾸는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다시는 타향으로 가지 않겠다고 약조하는 배호의 <두메산골>이나 부모님 모시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는 타향의 비정함과 회귀 자연의 정서라는 점에서 한 꾸러미다. 시대의 발전은 강촌을 온통 위락의 나들이 공간으로 만들기는 했어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고향의 실존 모델 그 이름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으는
꽃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서
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해가 지면 뻐꾹새가 구슬프게 우는 밤
희미한 등불 앞에 모여앉아서
다정한 친구들과 정을 나누고
흙내음 마시며 내일 위해 일하며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강촌에 살고 싶네> 김성휘 작사, 김학송 작곡, 나훈아 노래, 1969, 오아시스 레코드

 

복고풍 향수의 재발견, 인간축음기 신미래의 <오빠는 풍각쟁이야>
이제 강촌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탄다. 평일에는 자전거 탑승이 금지되고 공휴일만 가능하다. 한때 전일 자전거 동승을 허락했던 데 비하면 한참을 후퇴했다. 경춘선이야말로 평일에도 자전거를 지니고 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범 시행하고 있는 7호선의 출퇴근 시간 피한 평일 탑승이 경춘선에도 필요하다.
요즘 대세인 트로트 경연프로그램 <트로트 전국체전>에서 1위의 돌풍을 일으키다 톱8 문턱에서 좌절된 신미래의 유튜브를 되돌려 본다. 그녀가 바로 춘천 출신이다. 이 신예는 나의 대중가요 기행에서 처음 등장하는 20대다. 그녀를 각별히 불러 세운 이유는 그가 사라진 축음기의 목소리를 복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성 가수 심사위원단도 “볼륨을 올려 주세요” “죽인다” 소리를 절로 해가며 감탄한다. 그녀에게서는 백설희와 금사향이 살아 있고, 심수봉의 애조 띤 고음이 묻어난다. 그녀가 부른 <꽃마차>는 ‘극동의 파리’라고 부르는 하얼빈의 유럽풍 거리가 떠오른다. 급조하여 말도 안 되게 ‘건설의 꽃 서울’이라고 가사를 바꿨지만 ‘꾸냥의 귀걸이’ ‘만돌린 소리’ ‘방울 소리 울리는 마차’까지 바꾸지는 못한 원곡의 느낌이 확 살아난다. 박향림의 콧소리가 어울리는 만요 <오빠는 풍각쟁이>에서 짓궂은 오빠의 비행(?)을 낱낱이 까발려 ‘~쟁이’라고 불러도 밉지 않다. 연발하는 ‘무어’라는 감탄사가 김을 빼고, ‘난 몰라, 난 싫어’라는 여동생다운 애교에 이 노래의 전편이 공격성 풍자가 아니라 웃음 유발의 해학인 것을 우리는 쉬이 알아차린다. 이런 만요는 지금 트로트 전선에 스스로 몰려든 젊은 세대에게는 1930년대의 트로트 음악이 신세대 멋쟁이 음악이었듯 전혀 선입견 없는 신세계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고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싫어잉 난 싫어잉
내 편지 남몰래 보는 건 난 싫여
명치좌 구경 갈 땐 혼자만 가고
심부름시킬 때면 엄벙땡하고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오빠는 주정뱅이야 뭐 오빠는 모주꾼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밤늦게 술 취해 오는 건 난 몰라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고 월급만 안 오른다고 짜증만 내고
오빠는 짜증쟁이 오빠는 모주쟁이 오빠는 대포쟁이야
<오빠는 풍각쟁이>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박향림 노래, 1938, 콜롬비아 레코드

 

신미래는 우리 트로트의 미래다. 대중가요 110년사를 재조명하는 길에 그는 원형 복원에 가장 가까이 서 있다. 그게 열혈 대중들이 신미래 탈락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명분이며, 공영방송이 ‘트롯 전국체전’ 우승자들의 전국 퍼레이드에 그녀를 다시 불러 세우고 있는 이유이다.
트로트 경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많은 신예가 가족 해체 시대의 피해자이면서 조손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노래로 사랑과 이별의 한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러니가 있다. 코로나로 닫혀 버린 공간에서 가족이 한데 모여 휴대폰 불빛으로 팬임을 자처하는 열광은 신기한 놀이다. 열 살짜리가 어른들의 만남과 이별을 그대로 모사(模寫)하는 안쓰러운 신동의 조숙은 쓸데없는 걱정인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동요는 맥도 못 추고 어디 어디 꼭꼭 숨어버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