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4편]양주를 등지며 운명의 갈림길로(下)

김참봉 2010. 11. 16. 11:57

 

 

 

 

 

김안근은 방에 들어와서 젖을 빨다가 잠든 병호를 안고 있는 아내에게 눈짓을 주었다.

아내인 함평이씨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잠든 병호를 자리에 뉘이고 나서,

"병하야, 병연아, 이제 너희들 방에 건너가 글 읽어야지,"

"네, 어머니"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건너방에 들여 보내고, 곧바로 옆에 딸린 방으로 가서 언년이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거기들 앉거라"

김안근은 덕삼이와 언년이를 번갈아 보면서 비장한 각오로 말을 이었다.

"이제 너희들은 이 집에서 더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됐구나. 내일이라도 관에서 나와 집과 재산을 몰수할 것이고, 어차피 우린 헤어져야돼. 더 흉한 꼴을 보지 말고..., 이젠 언년이도 과년했고, 덕삼이도 부지런하고 마음씨도 착하고..., 해서, 두 사람이 짝을 맺어 이곳을 함께 떠나 행복하게 같이 살아라."

김안근은 말을 끝내고 뒤쪽에 놓인 장롱 문을 열더니 종문서와 보자기에 싼 폐물뭉치를 꺼내어 그들 앞에 던지듯이 내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만하면 어디든 가서 논 몇 마지기는 장만할 수 있는 물건이니 거두어라."

김안근은 다른 한손에 쥐었던 종문서도 펼쳐 보이고 곧바로 불을 붙여 옆에 놓인 화로에 던졌다.

"자 이제 너희 둘의 종문서도 불태웠으니 어디를가도 뒤쫓을 자가 없을테니 안심하고 떠나가서 살아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연놈은 주인내외 앞으로 기어와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덕삼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열 살도 채 되기도 전에 선천방어사가 어린 그를 거두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세가지 덕을 지니라고 덕삼이라 불러주었다.

언년이도 덕삼이와 비슷한 처지로 들어오게 됐는데, 이 두 연놈은 심성이 너무도 착하고 부지런해 병하와 병연이 그리고 젖먹이인 병호를 두 연놈에게 맡길 정도로 신임받는 심복이었다.

여름이면 덕삼은 병하와 병연이를 데리고 회암천 냇가에 나가 멱도 감기고, 봄 가을이면 집 뒤에 솟은 천보산의 망경대에 올라 남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서울의 뒷산인 삼각산과 도봉산, 그리고 이곳에서 남산이라 부르던 갈립산과 불곡산을 신비한 듯 바라보았고, 또한 천보산 자락에 있는 회암사지와 세 화상의 부도탑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는 형인 병하보다 어린 병연이가 더욱 졸라 자주 오르던 산과 회암사지다.

김안근 내외는 두 연놈을 달래어 그들 방으로 보내고 보따리를 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동은 며칠 전부터 결정지어진 것이었다.

이대로 앉아서 죽임을 당하느니 서로가 헤어져 자식들의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는 최후의 결정에서 얻은 행동이었다.

내일 아침 꼭두새벽에 병하와 병연이를 데리고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복 김성수 집으로 피신시키고, 두 내외는 젖먹이 병호를 데리고 또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보따리는 작았다.

이곳에서 곡산까지는 열흘은 더 걸어야 했기에 두 형제가 입을 겨울옷 한벌과 여름옷 한벌씩 쌌고, 그곳에 가서 공부해야 할 책 몇 권을 싸 놓았다.

두 내외는 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안방에서 함께 잠을 자기 위해 건너 방에서 자고 있는 병하와 병연이를 안아다 이불속에 눕히고, 어머니는 잠자고 있는 병연이를 얼싸안고 가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마당 앞 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내외는 소스라치게 놀라 전광석화와 같이 동시에 일어났다.

"아아! 관에서 우리를 잡으러 왔구나!"

김안근의 절규였다.

두 내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리 나는 대문 쪽으로 온 신경을 기울였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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