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에서 첫 밤을 지낸 병연은 형 병하보다 먼저 깨어 방안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양주의 집을 떠나 곡산까지 오면서 열두 밤을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깨었을 때처럼 곡산의 김성수 집 사랑방도 낯설었다.
병연이가 낯선 방안을 둘러보는 사이 옆에서 자던 형 병하가 잠에서 깨어 병연이를 바라 보았다.
"형, 오늘도 또 가는거야?"
"아니, 여기가 김씨네 집이라 했잖아. 여기는 우리가 김씨를 아버지라 부르며 지내야 할 집이야."
두 살 위인 병하의 대답은 의젓했다.
병연은 형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은 잠시뿐 불현듯 양주의 집이 떠올라 서러움과 그리움이 어린 그의 뇌리에 몰아쳐왔다.
아침 이맘때면 언년이가 따뜻한 물을 떠다가 세수도 시켜주고, 안방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드릴때면 어머니가 병연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우리 귀여운 도련님 밤새 잘 잤는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질펀히 고여 양미간으로 흘러 내렸다.
"형. 우린 왜 아버지 어머니와 헤어져서 여기서 살아야돼?"
울음섞인 병연의 목소리에 병하는 동생을 돌아다보았다.
동생은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병하도 따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야... 서북에서 난리가 나서... 우리 할아버지가..."
병하는 동생의 물음에 난감해하면서 말을 더듬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양주의 집에 있을때, 종복인 연놈들이 도망가기 전 모여서 수근거리는 귓속말을 들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더 이상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말끝을 흐렸던 것이다.
이는 두 형제가 집을 떠나올 때 '집안일은 물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함자를 묻거나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하라'는 부모님의 신신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에 병하는 말끝을 흐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갔다.
지난밤에 도착한 곡산 땅은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있어 양주와는 별천지였다.
황해도(지금의 황해북도)에 있는 곡산은 언진산맥과 거대한 아호비령산맥을 이루어 두 산맥의 사이에 커다란 분지를 이룬 곳에 마을들이 형성된 지역이었다.
병연의 형제가 곡산에 도착한 후 김성수는 이들 형제에게 '아무에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함자와 양주에서 왔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부모님의 당부를 되풀이해주었고, 당분간 집에서 멀리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는 1년 전 이곳에서 곡산민란(谷山民亂)이 일어났고, 이후 곡산부민과 관아와의 예리한 관계에 있어 당부한 말이다.
이곳에서 봉기했던 곡산민란은 1811년(순조11년) 2월 곡산부민이 부사의 탐욕을 참다못해 일으킨 농민봉기였다.
사건의 발단은 곡산부사 박종신(朴宗臣)은 감색(監色)과 백성들이 창고의 곡식을 몰래 빼어내 평안도에 팔아먹었다고 뒤집어 씌워 이들을 투옥했다.
그러자 평소 부사에게 불만이 많던 농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관아로 몰려가 권속들을 구타하고 부사를 가마에 태워 30리 밖으로 쫒아내버리고 감옥에 있는 감색과 백성들을 모두 풀어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정은 주모자 37명을 잡아다 목을 베고 부사 박종신을 울산으로 유배시켰다.
신임부사로는 좌포도대장으로 있던 오의상(吳毅商)을 부사로 임명해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이 사건은 오랜 삼정(三政)의 수탈과 탐학에 시달리던 빈농들의 항쟁이었으며, 이후로 1811년(순조11년) 12월 서북(평안도)의 농민전쟁(홍경래의 난), 1862년(철종13년) 임술농민항쟁,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의 쇠망을 예고하는 것으로, 곡산민란은 비록 폭동수준에 그쳤으나 19세기 초반의 지배층에 대한 농민항쟁의 초기단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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