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10편]김삿갓의 51년 방랑의 서곡, 홍경래의 난 조부 김익순, 서북인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

김참봉 2010. 11. 1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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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순조10년) 당시 백성들의 참상을 다산 정약용은 '조승문(弔蠅文)'이란 글에서 수없이 우글대며 날아디니는 파리에 비유해 이렇게 글을 썼다.

"(初略) 작년에 큰 흉연이 들고, 지난 겨울에는 몹시도 추웠다.

그러더니 염병이 돌고 여기에 가혹한 세금까지 긁어갔다.

곳곳에 쌓인 시체는 염도 하지 않고 관도 없이 거리에 널려 발길에 채이고

더운 바람에 부패하여 진물이 나오더니 마침내 구더기가 되었구나.

이들이 냇가의 모래알보다 만 배나 더 많이 늘어나서 날개를 달고 사람들에게 날아든다.

오, 쉬파리로 살아온 것을 보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이무렵 홍경래는 박천(博川)의 청룡사에서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그는 태천(泰川) 사람으로 재주가 뛰어났으며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출세 길이 막혀 항상 불만을 품고 살아가는 처지였다.

홍경래도 평안도 용강(龍岡) 출신으로, 1771년(영조47)에 몰락한 양반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총명했다.

외숙인 유학권(柳學權)에게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1798년(정조22년) 사마시(司馬試 :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나 그 낙방의 원인이 실력의 모자람이 아니고 공정성을 잃은 과거시험의 폐단과 서북(평안도)인 차별의 결과라는데 실망했고, 그 절망이 변해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홍경래는 서북인 차별로 사마시에 낙방한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팔도강산을 떠돌며 술수(術數)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각지를 유랑하면서 지배층의 부패상과 뱃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잘못된 모순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청룡사에서 만난 홍경래와 우군칙은 같은 처지에서 밤 가는 줄 모르고 현 세태에 대해서 털어 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래, 세상을 돌아보니 사람 사는게 어떻습디까?"

"말로 어떻게 다 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에서부터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나가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들은 체념이나 한 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허허 변고로군. 나도 다니면서 그런 꼴을 수 없이 보아왔고 소문도 많이 들었소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도 흉측한 세상으로 가고 있소이다."

홍경래는 한숨을 쉬어보이며 우군칙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것이 자기와 같음을 알고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우동지! 당신이나 나나 현 세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같소이다. 더구나 평안도 서북인은 벼슬길에서 배제시켰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도는 판이고 보면, 기회는 지금이외다."

홍경래의 말에 우군칙도 주먹을 불끈 쥐며 동조했다.

둘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변란의 계획에 몰두했다.

홍경래는 우군칙, 김창시(金昌始), 태천의 김사용(金士用)과 무역을 통해 부를 이룬 이희저(李禧箸) 등의 유능한 인사들을 포섭하여 농민군 최고 지휘부로 삼고, 이 지역에서 힘이 세고 날렵하게 행동하는 장사 홍총각(洪總角), 이제초(李濟初) 등을 규합하여 군사훈련의 우두머리로, 군사작전 시 선봉자로 끌어 들여 가산군(嘉山郡) 다복동(多福洞)에 본거지를 두고 농민전쟁을 준비했다.

이 무렵 병연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함흥중군에서 선천부사 겸 방어사의 중책을 맡고 선천으로 부임해온지 3개월이 되면서 서북인들의 거친 눈살을 받으며 범상치 않은 이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 홍경래 : 1771(영조 47) 평남 용강~1812(순조 12).

조선 후기 농민반란의 지도자.

세도정권의 부패정치, 삼정(三政)의 문란 등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여 1811년 조선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한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본관은 남양(南陽).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외숙인 유학권(柳學權)에게 글을 배웠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을 떠돌며 술수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노릇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각지를 유랑하는 동안 지배층의 부패상과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 박천의 청룡사(靑龍寺)에서 서자 출신인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시국을 논하는 가운데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는 우군칙과 함께 변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면서 향촌에서 부를 축적하여 지방유력자로 등장한 계층과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 및 조선정부의 지방차별정책으로 관로가 막혀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지식층들에게 접근, 이들을 포섭했다. 그결과 가산역(嘉山驛)의 관리 이희저(李禧著),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장사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등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각지의 기인(奇人)·도사(道士)·술사(術士)·무인(武人) 등을 계속 규합하는 한편,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의 유력자 김재찬(金載鑽)을 통해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2,000냥을 차용하기도 하고,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任尙沃), 정주의 부호 이침(李琛)·김약하(金若河), 안주 상인 나대곤(羅大坤), 송상(松商) 박광유(朴光有)·홍용서(洪龍瑞)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개설하고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유랑민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각종 물자와 무기를 구입·제작하여 다복동에 비축해두었다.
1811년 10월경 비밀 거점으로 삼은 가산의 신도(薪島)에서 이듬해 정월에 거병할 것을 결정하고, 주축 세력을 다복동에 결집시켜 군사지도부를 선정했다. 그러나 12월 중순경 움직임이 탄로나자, 12월 18일 거병했다. 농민군은 우선 가산 군아를 습격하여 군수 정시(鄭蓍)를 죽이고, 군대를 남북으로 나누어 각 군읍을 공략했다. 향반층의 내응을 받는 가운데, 북진군은 곽산·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 등을 점령했고,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진격목표를 놓고 지도부 내에서 의견이 갈려 4일간 지체하는 사이에 평안도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 등의 군사 1,000명이 안주로 들어오고, 중앙에서 파견된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의 정예군도 합세했다. 홍경래는 박천 송림리(松林里)에 진을 치고 군사를 3진으로 나누어 싸웠으나 관군의 초토작전에 밀려 참패하고 정주성으로 물러났다. 1월 중순경 다른 지역들이 관군에게 점령되어 고립된 상태에서 끈질긴 항전과 인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4개월가량 버티었으나, 4월 19일 관군이 성 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폭파시켜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와 농민군은 진압되었으며, 그도 교전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

 

 

 

출처 : 난고 김삿갓 기념화사업회
글쓴이 : 임종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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